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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Dec 22. 2021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낸 당신에게

엄마 없는 결혼과 임신, 출산

난 너무나도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 이 사람 절대 ~않을 거라더니 왜 갑자기 말바꾸지' 싶고,

어떤 상황의 장소, 계절감, 어투와 대화모두 기억할 정도로 기억력이 구체적인 편이다.


그게 엄마 없는 내게 슬픔을 끊어내지 못하는 고통이기도 했고 

엄마 없이도 엄마를 추억할만한 보물이 되기도 했다.





오래전 여름날의 저녁

대학생인 나와 중학생이었던 동생 그리고 엄마, 아빠는 식당에서 외식을 한 뒤 집으로 오는 육교를 건넜다.


"나 몇 살에 결혼해?" 라며 무심결에 내뱉은 내 질문에

엄마와 아빠는 웃음을 터뜨리며

"누가 너랑 결혼해준대냐? 그리고 뭘 물어, 결혼은 천천히 해야지!"라고 말하는 아빠와

"아냐 제일 예쁠 때 해, 어려야 드레스를 입어도 정말 예뻐~"라고 말하는 엄마의 대답을 들으며


나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난 어릴 때나 늙어서나 계속 예쁠 건데?!"


아빠의 "저 놈의 기지배, 공주병 단단히 걸렸네"라는 말과 동시에 모두가 웃었지만 

그 웃음은 배부른 저녁처럼 여유롭고 행복했다.


정말이지 그런 삶을 살았다.

날 공주병에 걸리게 한 것도 내 부모이고

내가 늙어서도 예쁘지 않을까 라며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게 한 것도 내 부모였다.


초등학생 때는 일찍 잠들지 않음 혼이 나니까

억지로 잠든 척 누워있으면

엄마와 아빠가 이불을 덮어주러 들어와 한참을 내 얼굴 위 콧김을 불어대며 날 바라봐 주었고

아빠는 '예쁘긴 진짜 예뻐'라며 이불을 끌어다 어깨까지 덮어주고 나갔다.


엄마는 늘 내 허리를 안고 행복해했고,

 첫 직장이 힘들어 울 때도 어젯밤 드라마에서 울던 사극 여주인공보다 예쁘게 운다며 엉뚱하게 날 웃겨 울음을 멈추게 했다.

본인을 안 닮고 아빠를 닮아 내 자식들이 모두 예쁘다며 왜인지 행복해하던 엄마의 모습이 눈에 훤하다.


무심코 물었던 "나 몇 살에 결혼해?"라는 질문에 대한 엄마의 대답대로 '어려서 예뻤던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유쾌하던 우리 네 가족은 내 결혼식에선 결국 세 명이 되었다. 

여전히 내 맘 한편에 엄마가 내 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을 얼마나 예뻐했을지 눈에 훤하다.






평범한 가족을 보며 나의 상황 때문에 불편함을 갖는다는 건 가져서는 안 될 이기심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시누이'를 보며 결혼한 딸과 친정엄마의 관계를 가까이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어떤 시간은 나도 엄마가 있다면 저랬을까 하며 흘러가는 감정으로 둘 수 있었지만

어떤 날엔 "엄마 내가 살게", "아냐 엄마가 살게!" 하고 투닥거리는 모습조차 부러워졌다.


그리고 때로는 엄마와 육아방식 등의 갈등을 빚는 여느 딸들과는 달리 오로지 가족이 1순위인

'효녀' 시누이를 볼 때면 나 역시 우리 엄마에게 닿고 싶은 마음이 밀려오기도 한다.






어느 날은 '시어머니를 엄마처럼 여겨보는 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꾸준히 함께 할 관계이니 '내가 노력한다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 엄마한테 하듯 내 모든 걸 보여주며 편하게 지내는 사이는 어렵겠지만

힘든 일이 있음 기대고 때론 조금 어려운 부탁도 할 수 있는 '딸 같은 며느리'가 되어 보는 건 어떨까 싶었다.


하지만 아이의 출산과 동시에 그 생각은 달아났다.

시어머니는 내 엄마가 아니기에 딸처럼 다가갈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발단은 '모유 수유'


아이에게 최고니까,

나온다면 줘야 하는 게 맞으니까,

분유를 주는 것보다 편하니까 라는 당연할 수 있는 말들은 내겐 오직 잔소리일 뿐이었다.


물론 우리 엄마였다고 해도 내게 같은 잔소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엄마였다면 "아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단번에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모유는 잘 나오냐"라는 끝없는 연락은 아이를 낳고 내가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첫 번째 선택마저 눈치 보게 만들었다. 시어머니에게 강한 어조로 내 선택을 말하기 어려운 나는 절대 '딸'이 될 수 없었다,

그렇게 새삼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내 '엄마'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엄마 없는 10여 년의 시간을 보낸 내겐 여전히 '내 엄마는 내 엄마뿐'인 채로 곁을 주지 못하고 살아간다.

나와 같은 상황에 놓여있는 분들이 시어머니 또는 주변의 어떤 좋은 분을 엄마처럼 대하고 의지한다면 좋은 인연에 진심으로 큰 축복이라 생각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다 해도 이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난 엄마가 필요하다고 힘들어야 하는 상황이 아닌

나 스스로 엄마가 되어주어야 하는 상황을 살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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