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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남긴 두 가지 결혼 조건

by 초희



엄마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나에겐 유언다운 유언이 없다.

대신, 자라면서 평소에 해주시던 말들이 내게는 삶의 지혜이자 유언처럼 남아 있다.



엄마와 수다가 끊이지 않던 나에게는

‘남자를 고를 때’라는 대화 카테고리 속에서 유난히 자주 들었던 한마디가 있다.



“남자를 만날 땐, 너와 입맛이 맞는지 꼭 봐.
그리고 너 자신보다 조금은 부족한 사람을 만나.”



어릴 땐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무슨 남자야” 라며 웃어넘겼지만 엄마 없는 20대 초반을 지나면서,

그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엄마의 지혜였다는 걸 알게 됐다.



특히 두 번째 말,

‘너보다 조금 부족한 사람을 만나’라는 조언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다.

흔히 엄마들이 하는 말은 어쩌면

‘너보다 여유 있는 사람을 만나. 그래야 네가 편해’ 일지도 모른다.

능력 있고, 재력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인생이 편하다는

엄마들 시대의 상식 같은 말들. 그런데 우리 엄마는 달랐다.



“너보다 너무 잘난 집안,

너무 잘난 남자를 만나면 네 기가 죽어.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하고 싶은 일도 못 하고, 쪼그라들 수 있어.
차라리 너보다 조금 부족한 사람을 만나서

네 기를 펴고, 네가 주도권을 가지고 사는 여자가 돼”



그건 엄마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었다.

외가가 친가보다 형편이 나았던 탓에,

결혼 생활에서 기죽을 일은 없었다고 했다.

오히려 그 편안함 속에서 서로를 존중하게 만들었다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돈 많은 집에 시집가라’는 말보다

우리 엄마의 조언이 훨씬 트렌디하고 주체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엄마의 말은 내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그리고 첫 번째 조언,

‘입맛이 맞는 사람을 만나’ 역시 내 기준에서 빠질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아웃백 메뉴를 달달 외울 때,

나는 뼈다귀해장국과 국밥을 좋아했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 1위]를 대라면 망설임 없이 뼈다귀해장국을 외칠 만큼.



엄마는 이런 취향이야말로 ‘코드’가 맞아야 한다고 했다.

하루 세 번 밥을 함께 먹는 부부가

그때마다 취향이 다르면 요리하는 뿌듯함도,

함께 먹는 즐거움도 사라진다고.

밥상에서 웃으며 숟가락을 부딪칠 수 있는 게 부부의 행복이라고 했다.



그 두 가지 조언을 품고 살다 보니,

나는 굳이 따지지 않아도 그런 남자와 결혼했다.

남편은 내 입맛과 잘 맞았고, 나를 기죽이는 법이 없었다.

자기 객관화가 잘 돼 있어 부족한 것은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내가 더 잘하는 것은 진심으로 응원하는 옹졸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지난주 토요일,

그 말들이 또 한 번 선명하게 떠오르는 순간이 있었다.



그날은 아이의 줄넘기 공개수업이 있던 날이었다.

오전 내내 체육관에서 아이를 응원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12시가 훌쩍 넘었다.

세 식구 모두 아침을 거른 터라 배고픔이 절정에 달했을 때,

우리는 차에 올라타며 “뭐 먹을까?”를 고민했다.

그때 9살 딸아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뼈다귀해장국이요!”



그 말을 듣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남편과 내 입맛이 맞는 건 이미 익숙했지만, 아이까지 이런 취향이라니.

순간 엄마 생각이 확 났다.

내가 엄마에게 들었던 ‘입맛이 맞는 사람을 만나’라는 말,

그리고 그 말이 내 인생에 스며들어 이렇게

또 하나의 ‘입맛이 맞는 가족’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뿌듯했다,



그리고 곧, 엄마의 두 번째 조언도 따라 떠올랐다,

‘나보다 조금 부족한 사람을 만나서 기죽지 않고 살라’는 말.

살다 보면 남편이 나보다 서툴고 빈틈 있는 순간이 있다.

가벼운 예로 남편은 '왜 이래, 나 똥손인 거 다들 알잖아' 등의

유머스러운 당당함이 나와 딸아이를 웃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빈틈을 채우며 단단해진다.



엄마의 두 가지 조언은 여전히 내 속에 살아 있다.
입맛이 맞는 남자와 함께 밥을 먹고,

내가 쪼그라들지 않는 가정생활.

그리고 우리를 닮아가는 아이까지,





엄마가 내 곁을 떠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매일 같이 엄마를 떠올리며 살 수는 없지만

지난 토요일엔 엄마에게 묻고 싶었다.








나 지금 잘 살고 있지,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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