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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럽마셀 Apr 02. 2022

아빠의 청춘 영원하여라!!!

아빠의 또 다른 자식들 

 어린 기억의 아빠는 항상 무서웠다. 우리가 싸우거나, 엄마에게 뭔가를 해달라고 조를 때면 엄마는 소리쳤다.

“수정이 아빠요!!”

이 한 문장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참고로 여기서 ‘수정이’는 우리 큰언니 이름이다.) 아빠를 무서워했던 우리 자매는 엄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디론가 도망가고 없었다. 그렇게 무섭고 가부장적이셨던 아빠가 15년 전 교통사고로 시각을 잃으셨다. 육십 평생을 건강히 사시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됐을 때 아빠는 극심한 우울증을 겪으며 힘들어하셨다. 그런 아빠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지병으로 거동이 불편하셨던 엄마의 사랑이었다. 엄마는 아빠의 눈이 되어주고, 아빠는 엄마의 손과 발이 되어 서로를 의지하며 사셨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돌아가셨고 아빠는 암에 걸리시면서 많이 약해지고 변해가셨다. 아침이면 전화를 하셔서 ‘갓김치 총각김치 담가 놨다, 텃밭에 상추 뜯어놨는데.  밥은 꼭 챙겨 먹고 다녀라.’ 친정엄마 역할을 하시며 내가 아이들에게 하는 잔소리를 다 큰 딸에게 하신다.      


 갱년기를 겪으며 돌아가신 친정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나는 아빠에게 전화를 건다. 아빠는 시각장애인 핸드폰을 사용하고 계셔서 내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벨 소리만으로 내가 누군지 알고 계셨다. 통화 연결음이 울리고 아빠가 전화를 받으시면 어김없이 먼저 말씀하신다.

“우리 셋째 딸 금서! 오랜만에 셋째 딸 목소리 들으니까 아빠가 기분이 너무 좋네!!”

아빠의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너무 죄송하다. 암 치료를 받으시며 자신도 많이 힘들고 지칠 텐데도 자식들이 전화를 드리면 세상에서 가장 밝고 행복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신다. 그리곤 뭐든 괜찮다, 잘 될 거라는 응원과 함께 “우리 딸 오늘도 좋은 하루 사랑해!”로 마지막 인사를 하신다.  

   

 얼마 전 아빠와 통화 중에 ‘어릴 땐 아빠가 너무 무서웠어요’라고 이야기를 꺼내자 아빠는 50년 만에 아빠가 무섭게 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 주셨다. 엄마 나이 18살에 시집을 와서 큰언니를 낳았다. 계속해서 딸을 낳자 아들 손주만 기다리셨던 할머니가 그렇게 엄마를 구박하셨다고 한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엄마는 시집살이와 집안일, 양복점 바느질까지 모두 하셔야 했다. 그런데 네 자매가 싸울 때면 ‘계집애들이 시끄럽게 한다’라고 할머니가 역정을 내셨다고 한다. 그럼 엄마가 더 힘들어질까 봐 아빠는 선수 쳐서 우리를 나무라고 무섭게 대하셨다고 하셨다. 


 아빠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우리 집은 1남 4녀이다. 엄마는 할머니의 온갖 구박과 시집살이를 견디며 결국에 윤 씨 집안 장손을 낳으셨다. 그렇게 귀하게 얻은 아들이었지만 살면서 아빠는 아들과 딸에 대한 차별은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우리 오 남매의 우애가 유달리 돈독한 이유가 그 속에 있었다. 누나 넷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똑같이 “언니야! 언니야!”를 불렀던 남동생이 긍정적이고 오빠 같은 성품으로 잘 성장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아빠의 평등한 자식 사랑 때문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부모가 돼봐야 부모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솔직히 나는 힘들게 고생만 하다 일찍 돌아가신 친정엄마를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아팠다. 반면에 하고 싶은 말 다 하시고, 먹고 싶은 것 맘껏 드시며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시던 아빠를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알 것 같다. 앞이 보이지 않는 자신을 자식들이 신경 쓰고 걱정할까 봐 자식들 마음의 짐을 덜어주고자 더 즐거운 척, 더 잘 먹고 잘 지내는 척 연기를 하다 보니 이제 그것이 일상이 되어 버리셨다는 것을…. 아빠랑 자주 통화를 하면서 깨닫는다. 아빠의 일상이 얼마나 외롭고 힘드셨는지, 밤새 열이 나고 온 뼈마디에 통증이 와도 자신은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던 아빠의 깊은 사랑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우울증으로 힘들어하셨던 아빠를 살린 건 반려견 쿠키(하얀색 말티즈)였다. 온종일 누구 하나 말 걸어 주는 사람 없었던 아빠에게 쿠키는 아내고 자식이었다. 쿠키는 항상 따뜻한 체온으로 아빠의 옆을 지켜주었고, 시각장애인이셨던 아빠의 눈이 되어주었다. 그런 쿠키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빠는 또 한 번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셨다. 하지만 매섭고 추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오듯 아빠에게도 또다시 봄이 찾아왔다. 아빠는 이번 봄에도 새로운 자식들을 키운다고 정신이 없으시다. 불굴의 에너자이저, 긍정적인 생각 아빠에게 다시금 행복한 목소리를 만들어준 나의 새로운 형제들은 다름 아닌 아빠 집 베란다 텃밭의 ‘화초와 채소’들이다. 


 아빠는 저녁 5시면 저녁을 먹고 해가 지는 7시면 잠자리에 드신다. 새벽 4시면 일어나서 라디오를 들으며 가볍게 아침을 먹고, 해가 뜨면 베란다 문을 열어 화초들과 인사를 나눈다. 베란다 문을 여는 순간 방 안 가득 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향긋한 블루베리 꽃향기와 풀잎 향을 맡을 때면, 살아있음에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고 한다. 텃밭의 작은 잎들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만져보며 오늘은 이놈들이 얼마나 자랐는지를 체크하시고, 아침밥으로 물을 가득 주신다고 한다. 한낮의 햇볕을 가득 받을 수 있도록 창을 열어주었다가 밤이면 찬 공기에 감기 들지 않도록 문을 닫아준다고 한다. 아빠는 추운 겨울이 지나고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는 요놈들을 보는 재미에 요즘은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들깨, 부추, 가지, 오이, 방울토마토, 고추, 쑥갓, 곰취, 치커리, 상추들이 어느새 내 형제가 되었다. 


 맛있는 거 먹어서 기분 좋고, 자식들 건강하고 잘되는 거 말고는 이제 삶에 바람도 여한도 없고 말씀하시는 아빠. 백발의 긴 머리를 멋있게 묶고, 빨간 바지에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채, 나이키 운동화 신발 끈을 고쳐 매시는 아빠는 오늘도 20대 청년이 되어 시각장애인 협회로 걸어가신다. 노래 교실에서 ‘멋쟁이 윤 훈아’로 어머니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흥을 돋아주시는 아빠의 청춘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내 몸의 암은 평생 나와 함께 살아갈 내 친구라 생각한다, 부디 갈 때는 많이 아프지 않게 데려가 줘!’라고 말하는 아빠를 보며 어떤 장애와 고독 속에서도 모든 건 내가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진다는 걸 또 한 번 느낀다.


“멋진 개량 한복 한 벌 해 입고 싶다.”라고 작은 소망을 이야기하시는 아빠의 모습이 오늘따라 왠지 귀엽게 느껴진다. 텃밭에서 키운 상추와 고추를 따서 삼겹살과 함께 쌈 싸 먹는 우리 아빠. 정성 들여 키운 자식들을 맛있게 먹고는 소주 한 잔의 흥에 취해 ‘나훈아의 테스 형’을 부르고 계실 아빠를 상상하면 입가에 저절로 행복한 미소가 지어진다.


 아빠와 많은 대화를 통해 그동안에 쌓였던 오해를 풀고, 따스한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부모가 되어도 부모님의 사랑을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자식이지 않을까. 부모님의 사랑은 늘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 

오늘도 멋쟁이 아빠 ‘윤 훈아’의 청춘을 응원한다.

아빠의 청춘이여 영원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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