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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 虎狼 이 사냥

by 김사과


애련지를 둘러싼 창덕궁 후원은 탐스럽게 핀 봄꽃으로 가득했다. 정자와 나무에 줄을 묶어 걸어둔 등불은 봄바람에 살랑거리며 일렁였고, 애련지의 수면도 꽃잎과 불빛으로 덩달아 반짝였다. 그렇기에 멀리서 달려오는 내관 따위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흐흐… 전하… 역모…“


왕과 후궁, 궁인들의 시선은 온통 처용무를 추는 기생들에게 가 있었다. 처용의 가면을 쓴 다섯 명의 기녀들은 각각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흰색 그리고 검은색의 화려한 옷을 입고, 머리에는 모란꽃과 복숭아 열매로 장식한 모자를 썼다. 춤을 추는 기녀들의 머리 위로 꽃잎이 흩날리고, 봄밤의 달빛이 흩날렸다.


왕과 후궁들은 술과 웃음을 나누며, 악공의 연주에 맞춘 기녀들의 춤을 구경했다. 그 아름다운 광경 속으로 창백하게 질린 내관이 뛰어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역도들이… 금호문을 열고 … 침입했습니다.”


연주하던 소리가 멈추고, 처용무를 추던 기생들 춤사위도 멈췄다.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수당 돌계단을 내려가 돈화문의 반대쪽으로 뛰었다. 그러자 내관들과 별감, 금군이 그 뒤를 따라 궁의 북쪽으로 사라졌다.




그다음은 아수라장이었다. 후궁들도 흩어졌고, 궁녀들도 주인을 쫓아 사라졌다. 악공은 악기를 챙길 겨를도 없이 도망을 쳤고, 춤을 추던 기생들도 처용 가면을 벗어던지고 숨었다. 남은 것은 검은색 무복을 입은 기생 하나였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기생은 처용 가면을 벗었다. 호산월이었다. 거추장스러운 무복을 벗은 호산월이, 횃불 든 반정군으로 가득한 대조전을 향해 뛰었다.


대조전 행랑 마당에 들어서자, 궁녀들의 비명과 도망치는 발소리가 소란스러웠다.


“아기씨! 아기씨! … 소은아!”


호산월이 궁녀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생각시를 불렀다. 주위가 점점 밝아졌다. 희정당과 선정전 쪽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곧 불길이 대조전으로 옮겨 붙을 기세였다. 주인이 도망치고 빈 궁궐은 이제 혼란 그 자체였다. 누구도 불을 끄려 하지 않고, 도망치기 바빴다.

“어르신! 여긴 어떻게 들어오신 겁니까?”




지밀나인들의 방에서 빠져나온 생각시가 호산월을 보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열다섯이지만 아직 계례를 올리지 않은 생각시는 호산월 눈에 다섯 살 아기처럼만 보였다. 호산월은 생각시의 손을 잡고 대조전 밖으로 걸었다.


“잠시만요. 어르신! 저는 저 불을 끄러 가야 합니다.”


“아니요!! 항아님, 저 불은 끌 수 없는 불입니다. 제 말을 들으세요. 당장 궁궐을 나가,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가야 합니다.”


반란군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발소리와 고함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칼에 맞은 궁인의 비명이 연달아 이어졌다. 놀란 생각시는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고, 호산월을 따라 대조전에서 나왔다.


호산월은 생각시의 손을 잡고 서쪽으로 걸었다. 임금이 도망치고, 비어버린 궁궐은 새빨간 화마에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그러자 생각시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주상전하께서는 무사하실까요?”

“그분이 걱정되십니까?“


자꾸 돌아보는 생각시에게 호산월이 물었다.




“전하께서 가끔 불러, 전쟁 때 함경도에서 호랑이 만났던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고 하셨어요. 호랑이가 무섭냐? 왜군이 무섭냐? ... 왜군이 무섭냐? 백성이 무섭냐?”

호산월은 궁궐 서쪽에 있는 요금문으로 걸으며 생각시의 말을 조용히 들었다.


“전하께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아버지라고 하셨어요. 아버지의 눈길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다고. 그런 생각이 들자, 호랑이는 무섭지 않았다고요. 저는 주상전하가 …가여웠어요.”


호산월이 생각시의 손을 꽉 잡으며, 궁궐의 외지고 캄캄한 숲을 걸었다. 등 뒤로 환한 불빛이 점점 빨라졌다. 무거운 발소리가 바로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지밀나인은 나이 든 년이든 어린년이든 다 죽여라!”


횃불을 든 반란군들 소리에 주위를 살폈다. 제사 도구를 모시는 창고가 보였다. 호산월은 생각시를 끌어다 창고 계단 아래 숨겼다.


“발소리가 멀어지면, 곧장 요금문 쪽으로 뛰세요. 문밖에서 아버님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누가 불러도 절대 뒤돌아보지 마시고 곧장 가세요.”




호산월은 생각시에게 신신당부하고,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며 숲 쪽으로 뛰었다. 그녀의 발소리를 좇아서 반정군들이 따라왔다. 아직 차오르지 못한 푸르스름한 달빛을 의지한 채 숲을 걷던 호산월의 귀에,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호산월은 어두운 숲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움찔해서 뒤돌아보았다. 그것은 계단 옆에 두고 온 생각시의 목소리였다.


“어머니! 살려주세요.”


어린 나인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애달프게 부르는 그 목소리에, 호산월은 심장이 내려앉고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너일 리가 없다. 어머니라 부를 리가 없어.“


호산월은 7살의 어린 소녀로 돌아가 인왕산의 작은 초가집을 떠올렸다. 차가운 방에 혼자 숨어 어머니를 기다리던 어린 소녀는 문밖에서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에 움찔했었다.

‘은섬아! 은섬아! 엄마야….’


문풍지를 뚫어서 내다본 마당에는 하얀 호랑이의 창귀가 된, 피두성이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아니었다. 혼자 남은 어린 계집아이를 호랑이에게 바치려고 창귀가 부르는 소리였다. 하지만 소녀는 문을 열어야 했다. 알면서도 문을 열고 호랑이 앞에 나가야 했다.



‘산군이시여! 저를 드시고, 어머니를 놓아주소서. 불쌍한 우리 어머니를 놓아주소서.’


그날을 떠올리며, 호산월은 생각시를 두고 온 쪽으로 돌아섰다.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호산월은 왔던 길을 다시 뛰었다. 궁궐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고, 전각 하나하나가 타들어 갔다. 궁인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호산월은 신발이 벗겨지는 것을 놔두고, 창고 쪽으로 뛰다가 멈췄다. 검은 연기에 달이 가려져 안 보였다.


“산군이시여! 목숨을 빚진 대신 이제껏 노예로 살았나이다. 남은 평생을 섬기려 하니, 딸아이를 살려주세요.”

멀리서 사내의 비명과 함께 짐승들의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호산월이 그쪽으로 다시 돌아서 뛰었다. 요금문 인근이었다.


문지기는 목이 뜯긴 채 피투성이였고, 생각시는 놀라서 돌처럼 굳어있었다. 그 앞에 떨어진 횃불이 점점 작아지자, 세 마리의 표범이 소녀를 향해 다가갔다. 살기 가득한 이를 드러내고 몸을 낮춘 채 소녀를 노리고 있었다.


“소은아!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


호산월은 가장 가까운 홍매화의 나뭇가지를 꺾었다.




나뭇가지로 바닥에 그림인 듯 글자인 듯 알 수 없는 문양을 그리고 그 밖으로 큰 원을 그렸다. 대조전 쪽에서 치솟은 검은 연기 사이로 만월이 되지 못한 달이 나타났다.


달빛이 숲으로 스며들고 원 안을 가득 채우자, 원에서 하얀 연기가 흘러나와 거대한 형태를 만들었다. 그것은 달빛을 흡수한 것 같은 하얀 호랑이였다.


-으르르르르르


코에 주름이 잡히고 이를 드러내며 목에서 토해내는 소리에 표범들이 이를 드러내면서도 뒤로 물러났다. 하얀 호랑이가 숲을 잠재울 것 같은 소리로 호통치자, 표범들은 숲으로 도망쳤다.


“소은아! 이리 와.”


생각시가 다가오자, 품에 꼭 끌어안은 후 호산월이 산군을 바라보았다. 맹세를 한 자는 고개를 숙이며 복종했고, 산군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쫓아오던 두 명의 반정군은 호산월이 돌아보자, 그대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박았다. 요금문을 연 호산월이 생각시의 손을 잡고, 궁궐을 나왔다.



“아버지!”


전옥서 신참봉이 막내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시는 아비를 보자 호산월의 손을 놓고 달려갔다. 신참봉은 호산월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막내딸의 손을 꼭 잡고 집을 향해 걸었다. 호산월은 멀찌감치 떨어져 따라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궁궐은 온통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눈이 부신 불길과 검은 연기가 하늘에 뜬, 만월이 채 되지 못한 푸른 달빛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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