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세량지에서(2023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 작품)
연두라 쓰고 꽃이라 읽는다. 봄이 오는 듯하더니 어느 사이 색깔이 스며들어 산천이 달라졌다. 여기저기서 나뭇잎이 꽃처럼 피어나고 있다. 손톱처럼 작은 새순을 내밀더니 쑥쑥 자라나 나뭇잎 하나하나가 모여 거대한 숲을 이룬다. 세상이 온통 연두다. 연두는 봄에만 잠깐 볼 수 있다. 봄비가 내리고 메마른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면 싹이 나온다. 하루가 다르게 내미는 연두는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빛이다.
지난겨울이 길었다. 세상은 잿빛이었고 그 빛은 칙칙해서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우울한 날들이 계속되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사람들의 기도가 모여 다시 봄이 왔다. 나무는 부지런히 활동을 시작하고 돋아나는 새순을 통해 생육이 시작되었음을 은근히 알려 주었다. 기쁨도 잠시 꽃샘추위가 휘몰아칠 때면 모두가 순간 숨을 멈춘다. 봄은 쉽게 오지 않는다. 꽃샘추위의 시샘이 크면 나뭇잎은 동해를 입는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에 몇 년간 우리 모두 겨울나무처럼 웅크리고 살았다. 오래 기다린 결과 다행히 바이러스가 약해지긴 했다. 물론 많은 희생이 있었다. 감염병 등급을 하향시키고, 조심스러운 일상 회복을 하고 있지만 새로운 변이에 대한 우려도 있다. 정기적으로 발생하거나 고유종으로 굳어지는 전염병이라도 해도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벼워진 것은 사실이다.
아무 일 없이 해방감을 맞이하듯 이 봄 웃을 수 있어 다행이다. 하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픔을 품에 안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에 마냥 웃을 수는 없다. 사는 일이 결코 밝은 빛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연둣빛 새싹이 돋아나듯이 활기 하나쯤 갖고 싶은 것은 나만의 바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리라.
엔데믹 전환 선언 시기가 봄이라서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이 봄, 땅을 뚫고 새싹이 나오고, 메마른 나뭇가지를 뚫고 나뭇잎이 나온다. 봄은 에너지가 발산하는 시기라 잔뜩 웅크렸던 마음을 활짝 펼 수 있다. 숨죽인 모든 것들이 파릇파릇 돋아날 것이고, 그 기운으로 조금은 힘들어도 이겨 나갈 것이다.
연두는 신선한 기운을 더해 준다. 그 빛을 보고 있으면 새싹을 내밀 듯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활기차게 기운을 차리고 곧 일어날 것 같아서 좋다. 세상을 살면서 조금은 어린아이처럼 더디고 느려도 괜찮다고 기운을 차리라고 연두는 말해 주는 것 같다.
연두는 위안의 색이다. 자연이 주는 연두가 얼굴을 내밀면 산천은 아무 말 없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품에 안는다. 나무는 연두의 살이 찌고 숲속은 세상의 잘못을 다 덮어 줄 것처럼 너그럽고 편안한 얼굴로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다. 꽃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진한 향기를 풍기지 않아도 숲을 향해 발걸음이 스며든다.
연두의 숲에 들어가면 정신적으로 평온하다. 카오스의 세계가 던져 주는 온갖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이 봄이 주는 연두가 그지없다. 연두가 주는 숲이 없다면 잿빛 세상에서 살아야 하리라. 생로병사의 우울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이 세상이 연둣빛으로 치장되어 있어 긴 우울을 떨쳐 버릴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다.
봄날의 연두는 굳이 기르지 않아도 된다. 그냥 바람만 불어도 비만 내려도 우리가 보아 주기만 해도 자연은 연두를 툭 던져 키운다. 나처럼 식물을 기르지 못하는 사람도 그 예쁜 연두를 보는 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세를 내지 않고 부채의 부담을 갖지 않는다. 이 봄날이 좋다. 살면서 세상에 빚지는 기분을 모르는 사람은 이 홀가분함을 연두에 비기어 말하지 못하리라.
봄날의 나른함에 졸기라도 하면 연두는 나를 물들여 제 곁에 둘지도 모른다. 대책 없이 저를 좋아하는 나를 알아채면 나는 모른 척 그 곁에 나무처럼 가만히 있어 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연두의 위안에 쉼을 즐기리라.
찰나의 봄날이다. 연두에서 생명의 기운이 돋는다. 지금은 연두의 시간이다. 누구도 간섭하지 말지어다. 이 연두의 시간을 오롯이 즐겨 볼 일이다. 이제 세상은 연두로 물들고 하늘에서 비라도 내리면 연두색 빗방울이 둥글게 둥글게 내려 세상을 씻어 줄 것이다. 세상의 바이러스도 씻겨 내려갈 것이다. 흘러 흘러 바다로 갈 것이다. 편견 없이 세상을 포옹하여 정화시켜 주리라.
연두의 시간 덕분에 산천은 더 푸르게 물들 것이다. 세상의 온갖 어지러움도 제 자리를 잡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아무 일 없듯이 잘 돌아갈 것이다. 연두는 나처럼 가난한 사람도 소소한 일상의 품으로 돌려보내리라. 산다는 것이 갚을 수 없는 부채지만 연두는 괜찮다고 토닥여 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