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서로의 존재가치

보석 같은 존재

by zejebell

“소유는 사용에 따라서 감소하는 반면, 존재는 실천을 통해서 증대한다.”

<에리히 프롬>


요즘처럼 무언가를 소유하고 있냐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나뉘고 부러움과 질시가 생기고 무엇보다 소유로 인한 빈부의 격차가 갈수록 심해지는 시대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더욱더 보이는 무언가에 집착하고 소유하기 위해 애쓰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저 사람도 저런 것을 가지고 있는데 나 정도면 저것을 가지고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비교는 점점 자신을 탐욕으로 빠져들게 하는 시작이 된다.


또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소유하고 자신의 마음대로 행동하고 싶은 소유욕에 사로잡혀 망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가지고 가져도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고 공허함은 늘어만 간다는 것을 이미 경험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계속되는 소유욕은 자신을 피곤하고 지치게 만들뿐더러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도 얻지 못하게 된다. 결국은 자신이 가진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증명해 내지 못하고 스스로 포기하게 되거나 파산하게 될 수도 있고 자신의 소유욕에 지친 사람이 자신에게서 영원히 등을 돌려 떠나게 할 수도 있다.


소유(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재능에 관한 것이든, 마음에 관한 것이든)에 대한 욕망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소유는 욕망이라는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사람은 이 소유의 욕망에서 어쩌면 영원히 자유로울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든, 자신이 도달하고 싶어 하는 모습에 필요한 재능이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스스로에게, 다른 사람에게) 받고 인정받는 것에서 큰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미 알고 있듯이 마음도 자꾸 쓰면 달아 없어지고 재능도 언젠가는 익숙해지며 물질은 사라진다.


그럼에도 그 욕망을 어떻게든 실현한 사람은 스스로에게 높은 가치를 부여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은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현실에서는 낮은 수준에 그치게 되고 때로는 욕망이 꺾이는 경험도 종종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유의 실패에 대한 경험이 다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만은 아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인생의 슬픔과 무의미함, 고통과 낙담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고 자신이 생각하는, 또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받아들이고 찾게 되는 또 다른 욕망의 동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어느 즈음에 이르게 되면 인생과 타협하는 방법도 알게 되고 자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가기 마련이다. 드디어 행복이 소유에서 온전히 오는 것이 아님을 알아가며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그것이 가족들 사이일 수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서서히 인식해 간다.


소유는 생각만큼 그 무언가를 증명해 주지 못한다. 내 존재라는 것이 집이나 자동차, 옷 혹은 재능 등으로 보이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어느 정도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는데 자신의 존재를 고민하거나 보이는 것에 신경을 쓰거나 하지는 못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생존이 우선이 되기 때문이다.


보이는 외적인 모습보다는 정말 거칠고 험난한 이 세상에서 우선 살아남는 것,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때로는 가치 있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가끔은 보이는 존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아 존재하고 있는 자신 자체에 대해 어쩌면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는 것이 마땅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소유에 실패한 스스로를 세상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런 무의미한 가치 없는 존재라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론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높게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존재가치는 별로 신경 쓰고 살지 않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인류는 현대에 들어서 엄청난 기술적 발전을 이룩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눈부신 발전의 반대편에 점점 더 존재의 가벼움과 그 가치의 훼손이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이제 더 이상 조상의 지혜는 빛나지 않고 통용되지 않아 보인다. 현실에 있어 보이는 가치는 오직 소유를 통해서만 정해지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꾸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치의 기준을 소유에 두는 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존재가치가 한없이 가벼워지는 이유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무시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다시 무시한 사람 역시 더 많이 소유한, 더 힘 있는 다른 사람에게 무시받는 사람이 된다. 이론적으로 우리의 존재가치는 다른 사람의 존재가치와 그 무게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가치에 대한 무게를 매일 저울질하고 괴로워하면서도 서로를 무시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렇게 살아내고 있는, 꿋꿋이 생존하고 있는 서로에게 자신의 존재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하고도 모순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를 무시할 때 무시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존재가치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무게를 더한다. 소유에 집중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만을 가치 있게 여기는 본능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의 존재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도 모른 채 그 가치를 스스로 저버리게 된다.


존재가치의 의미를 저버리는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오직 자신이 소유하는 것 말고는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의미가 되지 못함으로 그 생은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이 되거나 오히려 더 갖지 못한 생에 대해 증오심을 갖게 될 수 있다. 스스로에게도 자신의 소유에 대한 집착은 고통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로 스스로 인식하는 것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본인만 모른다. 어쩌면 알고 있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소유를 향한 사람의 마음은 끝이 없다. 그러나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쓰면 쓸수록 소유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기 마련이다. 소유에 기댄 존재가치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기 자신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이 될 뿐인 존재들은 정작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이 아무리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람이 미워도 세상에 자신만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홀로 존재하기 위해 어딘가로 떠나거나 어딘가로 숨는다 해도 자신이 모르는 누군가의 직, 간접 도움이 있어야만 결국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애써 무시하려고 하거나 자신이 혼자라고 착각하며 사는 것 역시 다른 사람의 존재가치와 자신의 존재가치를 다 같이 부정하는 일이 될 뿐이다. 결국 우리는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해 보이나 서로를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절대적인 가치를 증명해주지 못하듯이 우리의 존재가치는 서로가 있어야 비로소 그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식하고 진정한 자신의 존재가치를 만들어 나갈 때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은 의미 있는 관계가 될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가치 있는 무언가는 그 가치대로 쓰일 때 가장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고 그 가치는 서로 원하는 바가 다른 것처럼 다 다르다. 가치에 대한 경중을 따질 수는 없지만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서로에게 좀 더 쓸모 있는 가치를 더 해주고 받을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는 있다.


우리의 존재가치는 더 이상 소유의 비교 대상이 아닌 마음과 행위로써 스스로 존재하는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삶의 어떤 순간에서 우리가 서로 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이 세상에서 보낸 시간들이 쌓여 각각 존재해 온 모습에 대한 그 가치가 우리 앞에 드러나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인생은 우리 모두를 철학자로 만든다.”

<모리스 리즐링>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될지는 지금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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