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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문정 Nov 04. 2021

파리, 축제의 한마당 벼룩시장


파리, 마로니에 나무 진초록 나뭇잎 사이사이로 에펠탑 모양으로 핀 꽃송이들이 탐스럽다. 잔잔히 흐르는 세느 강변 주위로 아름드리 서 있는 미루나무 여린 잎이 훈향 담은 바람에 살랑이고 갖가지 꽃나무에 비치는 햇살 또한 환하다. 춘분 지나 한식 지나고도 진눈깨비와 우박까지 섞어가며 사람들 마음을 흔들어대던 3, 4월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몽마르트르 너머로 완전히 날아갔다고 느낄 즈음 파리엔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기온 오르며 푸른 기운 번지는 오월, 파리 곳곳에 ‘브로캉트’라는 독특한 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 시기엔 길목 좋은 거리나 광장에 하얀 차양을 드리우고 보기 좋게 가판대가 설치된다. 그 위엔 겨우내 창고에서 숨죽이고 있던 진귀한 골동품들과 올망졸망한 잡동사니 물건들이 한껏 기지개를 켠다. 규모가 큰 장엔 제법 고급스러운 장식장과 가구들도 화려하게 늘어서 있다. 하지만 제 아무리 빛을 낸다 한들 이곳에 나온 모든 물건들은 새것이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때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며 진진하게 사용되었고 다정스러운 손때가 묻은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장’ 이야기가 나왔으니 프랑스 장에 대해 좀 풀어놓아 볼까 한다. 프랑스 전역에 서는 장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주말에 열리는 상설장과 요일을 바꿔가며 동네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서는 재래장, 그리고 봄, 가을에 열리는 '브로캉트'라고 부르는 장이다.


첫 번째로 파리 상설 장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 년 내내 주말마다 열리는 장이다. 파리 남서쪽 <포르트 드 방브>와 파리 동쪽 <몽트뢰이> 그리고 파리 북쪽 <클리냥 쿠르> 혹은 <생 투앙>이라 불리는 곳이 대표적인데, 예전보다 장의 특성이나 분위기가 퇴색했다는 평을 듣는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쓸만하거나 소장하고 싶은 작품(!)을 적잖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아직도 일반 사람들은 물론 소품이나 골동품 애호가들이 찾는 곳이다.


브로캉트에서는 손때 묻은 물건들이 귀한 보물처럼 다뤄진다.


두 번째로 파리 어느 동네나 할 것 없이 일주일에 두세 번 열리는 ‘재래장’이 있다. 지금 내가 사는 동네엔 화요일과 목요일 그리고 일요일 세 번 장이 선다. 이곳엔 신선한 채소와 과일, 육류와 어물뿐 아니라 올리브 절임이나 맛깔스러운 저장식품 등이 주류를 이루지만 박물장수 같은 감초 상인들도 재래장의 흥을 돋워준다. 그들이 차려 놓은 진열대 위엔 저렴한 옷가지와 액세서리 혹은 주방에서 사용하는 여러 가지 기기들, 마늘 찧는 기계, 배수구 막이, 그릇 놓는 실겅 등 잡다한 것들이 쌓여 있다. 아울러 어느 장이나 주위를 향기로 채워주는 꽃 파는 사람들과 아코디언 혹은 낡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구성지게 에디트 피아프 노래나 전설 같은 샹송을 부르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이런 재래장을 거닐다 보면 도심 한가운데서 새삼스럽게 파리 사람들의 진솔함을 만끽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브로캉트’라고 하는 특별장이다. 사실 파리를 찾는 관광객들이 ‘가고 싶다’고 하는 <벼룩시장>은 브로캉트에 가깝지만 이 장을 보기는 쉽지 않다. 봄과 가을, 날씨 좋은 시기에 열리는 브로캉트는 바스티유 광장이나 몽소 공원 앞에 2주가량 열리는 규모가 큰 장을 제외하면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긴 해도 보통 주말에 2~3일 열리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두세 번 서는 재래장은 거리의 축제마냥 흥겹다.


유리나 사기그릇에 조금만 흠이 가도 사용하기를 꺼려하는 우리네 취향과 달리 이곳 사람들은 그릇에 흠집이 있거나 윗부분이 깨져 있어도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기 때문인지 브로캉트에는 누군가 쓰던 컵이나 접시 그리고 포크 세트 등 식기 종류가 많이 나와 있다. 아울러 제법 규모가 큰 가구부터 액자에 들어있는 그림들 그리고 문양 독특한 장식품들이 상인들에게 정성스레 닦여져 말끔한 상태로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계절 장인 브로캉트는 상설장이나 동네 재래장의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일반적으로 신간이 아닌 책은 이미 세느 강가의 명물로 자리한 고서적 가게들과 주말에만 열리는 ‘중고 서적 전문 책 시장’을 찾아야 하지만, 브로캉트에서도 다양한 책들을 고를 수 있다. 이미 종이가 누렇게 변해 연륜이 느껴지는 책들과 책과 관련된 소품들, 예를 들어 책을 놓고 볼 수 있는 책 받침대부터 책을 고정시킬 수 있는 나무꽂이, 다채로운 모양의 나무 책갈피 등을 고르는 재미도 쏠쏠하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50~60년대 영화 포스터와 작은 카드에 찍힌 추억의 영화배우들, 우표 붙여진 빛바랜 엽서와 광고 포스터 등이다. 보기만 해도 옛 정취가 느껴지는 엘피(LP) 레코드판과 도대체 “어디에 있다 나왔을까” 싶은 생각이 들만큼 낡은 축음기 등도 어느 브로캉트에나 양념처럼 자리하고 있다.


브로캉트 상징인 하얀 천이 걷힐 때 즈음 파리엔 초여름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여름이 오기 전에 나도 파리 사람들 속에 적당히 묻혀 브로캉트 장터의 분위기를 느껴야겠다. 봄빛 절절이 녹아있는 따사로운 기운 받으며 느른하게 걷다가 녹록한 피로에 젖어들 즈음, 진진한 골동품 가운데 알라딘의 램프 같은 '마술 요술램프'를 찾을 수도 있을 테니 서둘러야겠다. 어느 장으로 향할까?


온갖 물건으로 진열되어 있는 파리 브로캉트 가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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