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으로 물든 바다 위로 선박이 지나갈 때마다 배 뒤로는 숨겨놓았던 바다의 속살 같은 옥빛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배 양옆으론 포말이 구름을 만들고 바다내음이 코끝에 머문다.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모르비앙에 속한 키브롱과 벨 일은 대서양의 블루 사파이어라 부르고 싶을 만큼 빛깔이 짙고 심오하다. 아울러 이 지역은 여느 여행지와 달리 마치 선사시대를 탐사하는 듯한 신비함을 느끼게 해 준다.
카르낙의 거석들
오래(Auray)에서 키브롱으로 가는 도중에 인상적인 풍광을 많이 보게 된다. 해변과 바다는 물론 모래언덕과 해변에 놓여있는 조형물들은 여행을 지루하지 않게 해 준다. 특히 선사시대의 고분과 거석 군이 있는 곳으로 잘 알려진 카르낙은 초기에는 약 만여 개의 거석이 줄지어 있었으나 현재는 4천여 개만이 이 지역 곳곳을 지키듯 묵직하게 서 있다. 메넥(Menec)의 거석들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작게는 50센티부터 4미터 정도의 선돌들이 11개의 줄에 일정한 간격으로 약 1.2킬로미터 길이로 도열해 있다. 물론 옛사람들이 처음 돌을 옮겨다 놓았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컸으리라 여겨진다. 2천여 년이 넘는 시간을 품고 서 있는 거석을 보노라면 경외심마저 든다.
카르낙을 지나 키브롱 방향으로 가는 길엔 줄곧 바다가 따라와서 오염되지 않은 푸른 물빛으로 정화되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 근처 숲의 나무들은 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로 제멋대로 휘어있다. 긴 세월 해풍에 부대껴 한쪽으로 쏠리듯 비스듬히 세상을 바라보는 나무들! 그들은 이 지역 바닷바람의 위력을 온몸으로 견뎌내며, 존재 그 이상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고인돌은 카르낙의 거석들만큼이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다. 분명 수천 년 전 우리와 같은 사람의 손길이 닿았을 것이기에 그렇다.
- 대서양 인근 메넥의 거석을 보고 오는 길에 만난
녹푸른 들판을 눈으로 스케치하며
구릉을 지날 때 낯설지 않은 풍경 하나
살그머니 다가가니 투박한 바위가 앉아 있다.
인사를 나눈 뒤 찬찬히 훑어보니
그리 맵씨는 없어도 끈기와 심지 하난 타고난 듯
나이를 물으니 하도 오랜 세월이 흘러 어렴풋한데
한 이천 살은 넘지 않았겠냐 외려 반문하며 빙긋 웃는다.
이 외딴 곳에서 외롭지 않냐고 물어도 빙그레 웃기만.
거북이 등짝마냥 단단한 몸체에도
세월의 낙관이 군데군데 찍혀있어
마음 고생도 했음직한데 그 양반 속도 좋지 웃기는.
그래 이천 년을 무슨 낙으로 살았느냐 물으니 멋적게
싱긋이 웃더니 하늘 보고 별 보고 바람도 맞고 비도 맞고
계절이 머물렀다 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낙이 따로 있겠소
잠시 명상에 잠길 테니 살펴나 가시오 인사하곤 눈을 감는다.
아마도 성가스러웠던 게지 무뚝뚝하기가 돌 같군
머쓱해하면서도 진득한 그 모습에
뒤 한번 돌아보고 인연도장 마음에 깊이 새긴다.
- 강문정, <양철가슴> 문학동네
벨 일로 가는 배가 출발하는 키브롱
생 피에르에서 남쪽으로 향해 달리면 돌출된 모르비앙의 끝자락 키브롱에 닿는다. 이곳 해변은 한 여름엔 피서객들이 수영을 하며 평화롭게 망중한을 즐길 뿐만 아니라 다른 계절에도 방파제에서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 벨 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키브롱에서 가장 활기찬 곳은 이 모든 전경이 보이는 마리아 항구(Port Maria)다. 바로 이곳에서 대서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벨 일(이름 자체가 ‘아름다운 섬’을 뜻한다)로 향하는 배가 출발한다.
마리아 항에서 벨 일까지는 45분 정도가 소요되며 카페리호로 운행되기 때문에 항해의 기쁨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또한 벨 일로 다가가면서 듣는 뱃고동 소리 또한 여행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배에서 나오자마자 본 벨 일, 강렬한 태양빛에 환하게 드러난 벨 일의 르 팔레 항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부시다. 한때 이곳이 어업전진 기지였음을 알려주듯이 요트와 고기잡이 배들로 가득한 항구는 지금 일급 관광지로 탈바꿈했지만 아직도 곳곳에 소박한 어촌의 풍경을 담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도는 벨 일
르 팔레 항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시타델이다. 17세기 루이 14세 통치 때, 룩셈부르크에 성벽을 설계한 보방 대원수가 심혈을 기울여 건축 설계했다. 외부에서 적이 안으로 침입할 엄두도 못 낼 정도로 견고하게 만들어진 이 건축물은 당시 중요한 요새 역할을 했으며 현재 내부는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이외에도 아름다운 해변을 자랑하는 소종(Sauzon) 항, 천연의 암벽 속에 감춰진 바다를 볼 수 있는 바다동굴, 인상주의 완성자인 클로드 모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풀랭(Poulains) 곶, 그리고 코트 소바쥬(Côte Sauvage)까지 섬을 일주하면서 함께 보는 대서양 바다는 자연의 신비를 일깨워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곳을 찾는 대부분 사람들이 육지에서 갖고 온 자동차나 렌터카를 이용해서 섬을 돌아본다. 그것도 편안하고 좋긴 하지만,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천천히 섬의 내밀한 곳까지 가보는 것도 신선하고 경쾌함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다. 자전거 여행의 매력은 좁고 후미진 곳도 갈 수 있고 원하는 곳에서 언제든지 쉴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쉬엄쉬엄 다니면서 작은 마을들 정취와 구릉에 피어 있는 들꽃들을 눈으로 감상하고 담아오는 것도 좋다. 섬에 있는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결코 현란하지 않은 섬, 야생 그대로의 소박한 풍경이 편안하게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