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때 목적지만큼이나 기억에 남는 것이 가는 도중에 만나는 풍경들이다. 가령 녹색 평원에 펼쳐진 노란 유채꽃물결이라던지 일렬로 늘어선 나무 사이로 이어지는 좁다란 산책로와 나지막한 돌담길, 마을 어귀에 있는 작디작은 분수나 골동품처럼 자리한 공동 빨래터 등이 그렇다.
벨기에의 브뤼헤도 예외는 아니다. 외곽에서 도심으로 들어가면서 보는 풍경이 인상적이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명소임에도 북적이지 않고 도심과 그 주위를 혈관처럼 흐르는 운하가 있어서 작은 시냇가를 걷는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시원의 울림, 또각또각 돌길 위로 퍼지는 말발굽 소리가 자유로운 몽상으로 나를 이끈다.
말굽소리와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도시
바다에 인접해 있어 이미 8세기경 세계적인 항구로 알려진 브뤼헤는 유네스코가 인류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도시다. 이곳은 13세기부터 막강한 상권과 결속력 있는 길드 조합 덕분에 북유럽의 중요한 도시로 부각되었다. 875년 플랑드르의 봉건 영주였던 보두인 1세가 프랑스 왕으로부터 이 지역을 봉토로 하사 받았다. 그가 바이킹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견고한 성채를 세우고 여러 곳을 정비하면서 브뤼헤는 본격적으로 도시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다.
브뤼헤의 출발점이며 성채의 흔적이 남아있는 부르크 광장에는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 줄지어 모여 있다. 그중 시청은 1376년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것으로 적어도 플랑드르 지역 시청 가운데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바로 옆에 자리한 것이 생 상 성당으로 2차 십자군 원정 당시 티에리 달라스가 예루살렘에서 성혈이 담긴 성물을 갖고 와서 그곳에 모셔 놓았다. 1150년 4월 7일 성물을 안치하는 장엄한 미사가 진행될 때 예사롭지 않은 의식을 보려는 사람들 행렬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예수 승천 대축일이 되면 성당 앞 광장에는 축제가 열린다. 참가자들이 중세 때 복장을 하고 붉은 십자가를 든 채 굳건한 신앙심을 표현하는 퍼레이드를 하는 동시에 일반인들도 함께 즐기는 수 있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그 이외에도 어느 도시, 어느 마을에나 앙증맞은 간장 종지처럼 빠지지 않는 여행자 안내센터가 있는 부르크 건물, 고문서보관소, 그 뒤쪽으로는 법원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명소를 도는 마차가 대기하는 기점이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도시 한가운데서 마차를 보고 말발굽 소리를 듣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브뤼헤에서는 가능하다. 마차 외형이 그다지 호화롭지 않아도 마차를 타고 돌길을 돌아보는 것은 브뤼헤의 풍미를 더해 주기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즐겨 탄다. 그러나 양 눈 옆에 챙을 달고 앞만 보며 뚜벅뚜벅 걷는 듯 달리는 듯 가는 말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측은한 생각에 마음이 아리다. 마차에 탄 사람들이야 즐겁기 이를 데 없겠으나 왼종일 같은 길을 걷고 또 반복해야 하는 말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걷는 것일까?
- 벨기에 브뤼헤의 한나절
북적임 사라진 천년 고도는 창연하고
촘촘히 박힌 돌이 원을 그려 놓은 길 위엔
사람들 방금 흘린 말간 웃음이 구른다.
웃음소리 한차례 지나간 뒤 오는 마차는
동화 속 알토란 같은 호박이 변한 건 아닌 게지.
두 눈 옆으로 챙을 달고 힘겹게 수레를 끄는 말
물 머금은 솜처럼 무거운 손님 네다섯을 태우고
걷는 말의 눈엔 지루한 돌길만이 이어지겠지.
또각또각 말굽소리 골목골목 퍼져 나갈 즈음
팔백여 년 고즈넉이 서 있는 키 큰 종루의 울림
마음속 빗살에 푸릇한 넝쿨처럼 피어오르고.
햇살 잦아든 삼월은 아직도 싸늘한데
고도의 혈관처럼 흐르는 운하에 백조들 노닐어 따사롭다.
푸른 물빛 닮은 하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들판 마냥 펼쳐진 풀밭 저편 연륜 짙은 풍차가
천년의 몽상 속에 심연의 노를 젓는 저녁나절
어스레한 기운 물살처럼 번져 오르는 고도에
한 점으로 아른대다 꿈길로 접어드는 나그네.
- 강문정, <양철가슴>, 문학동네
부르크 광장에서 조금만 발길을 옮기면 마르크트(Markt)라고도 하는 광장에 닿는다. 수세기에 걸쳐 이 도시의 경제, 사회, 정치적인 토대를 마련해준 가장 중요한 장소인 광장 한가운데에는 돌과 청동으로 만든 기념물이 있다. 1302년 프랑스 주둔부대를 공격하고 점령해서 프랑스로 합병되는 것을 모면하게 해 준 얀 브레이델과 피터 코닉이 원형 탑 위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뭐니 뭐니 해도 이 광장의 상징은 역시 종루(le Belfort, 프랑스어로는 벨프루와(Belffroi)다. 브뤼헤 사람들이 도시의 심장이라 부르는 종루는 1240년경에는 나무로 짓기 시작했는데 나중엔 벽돌로 재건축해서 15세기에야 비로소 현재 탑의 외형과 내부를 완성할 수 있었다. 83미터 높이와 366개의 계단, 47개의 종소리가 압권이다. 매시간 네 번 종들의 합창이 울려 퍼지는 예술작품과도 같은 묵직한 종루는 시내 어느 곳에서도 보이며, 브뤼헤 사람들의 긍지를 높이는 데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이곳에 올 때면 망루에서 내려다보는 광장과 조화로운 브뤼헤 풍광을 만끽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곤 한다. 처음에는 조금이라도 빨리 오를 요량으로 서둘러 올랐다가 숨이 턱에 닿을 듯 힘든 순간을 몇 차례 경험했다. 이후로는 증기 기관차가 기적소리를 내며 천천히 굴러가듯 “칙칙폭폭 칙칙폭폭” 두 번 들이쉬고, 두 번 내쉬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렇게 규칙적으로 숨을 고르며 계단을 오르다 보면 힘들이지 않고 정상에 이를 수 있다. 그렇듯 시행착오를 하면서, 때론 깨닫기도 하고, 때론 이런저런 바람직한 방법을 찾으며 이어가는 것이 여행의 묘미 아니겠는가?
자연에 동화된 유서 깊은 건축물
광장에서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그중에서 스틴스트라트(Steenstraat)나 우드부르크(Oude Burg) 길을 따라 나오면 99미터나 되는 생 소뵈르 성당이 웅장하게 서 있다. 좀 더 나아가면 검은빛의 조각상들이 흰 물줄기와 잘 어우러진 광장 분수대가 보인다.
자전거 길과 함께 이어지는 공원 길 또한 멋진 산책로이며, 조금 거리가 있긴 하지만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인트 얀 병원과 베긴호프 수도원이 서 있다. 세인트 얀 병원은 12세기에 지어졌으며 특이하게도 병원 건물 내부에 화가 메믈링(Memling) 작품 등이 전시된 미술관이 있다.
아울러 1245년에 지어진 베긴호프 수도원 건물에선 짙은 연륜이 묻어난다. 계절마다 빛을 바꾸는 아름드리나무들은 외부로부터 수도원을 보호하는 수호신 같고, 수도원과 작은 숲의 절묘한 조화는 신비하고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나는 나무와 풀잎 내음 가득하고, 지극히 고요한 숲과 수도원을 바라보면서 그곳에는 산란한 번뇌나 사악한 죄악은 한 오라기도 없을 거라 생각해 본다. 수도원에서 남쪽으로 ‘사랑의 호수’ 주위로는 공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 평온한 마음으로 명상하기에 좋다. 유난스레 무딘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시적 감흥이나 예술적 영감을 충분히 전해받을 수 있는 곳이다.
그루투세스트라트가 시작되는 오른편으로 보이는 건축물은 그루투세 박물관이다. 15세기에 궁이었던 이곳은 귀족들이 사용하던 가구들과 예술품 그리고 골동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과 연결된 곳에 고딕 양식으로 만들어진 노트르담 성당이 보인다. 성당 첨탑은 무려 122미터나 되며 성당 내부에는 장엄함과 숭고함에 감탄하게 되는 종교화들과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으로 만든 걸작품 <성모자상>이 방문객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준다.
운하를 따라 펼쳐지는 풍경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도시를 감싸고 있는 타원형의 운하다. 도심에도 좁은 운하들이 절묘하게 흐르는데 특히 유람선이 다니는 이 물길엔 백조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어서 붉은 지붕이 독특한 조화를 이루는 벽돌집과 함께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운하를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는 평화롭고 고즈넉하다. 인근에는 모양이 각기 다른 소박한 성문이 문지기처럼 서 있고 커다란 풍차 세 대 또한 운치를 더해준다.
브뤼헤는 2차 대전 때 공습을 받지 않아 도시 전체가 대부분 예전 중세 때 형태와 특징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편이다. 특히 단층으로 된 작은 집들과 작고 네모난 돌이 문양처럼 촘촘히 박힌 길 그리고 유난히 깨끗하고 좁은 골목길들이 인상적이다. 과거에 나사 등 직물 주도권을 놓고 영국과 대립이 최고조로 달하던 13~15세기 시절, 그토록 번성했던 수공업의 맥을 잇는 레이스 제조기술 덕분에 도시 곳곳에 상점들이 가지각색의 섬세하고도 아기자기한 레이스 상품들을 진열해 놓고 있다. 이처럼 진열된 상품들은 브뤼헤 도시 전체를 수놓고 있는 듯하다.
중세부터 현재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찬찬히 분위기를 느끼고 난 후 광장으로 돌아와 종루 맞은편에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하늘빛이 아니라 프랑스 남불을 여행할 때 에즈(Eze)에서 바라본 지중해의 짙은 코발트 바다 빛이었다. 이 푸르디푸른 바다엔 르 벨포트(le Belfort)가 등대처럼 우뚝 솟아 있고 광장은 정적이 감돌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스름해지자 사람들은 새롭게 해람할 순간을 기대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