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시대다. 그저 이리저리 묻혀 지내는 것이 현명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남이 기억할 만한 특징 하나쯤 지니고 있는 것이 때로는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사람뿐 아니라 도시도 예외일 순 없다. 프랑스 코르스(코르시카) 섬은 그런 면에서 그 만의 독특한 빛깔과 향기를 뿜어내는 곳이다. 이 섬은 한번 찾으면 끊임없이 그리워하게 되는 마력이 있다.
코르시카 섬 안에는 보석 같은 지역이 많다. 그중에서 강렬하면서도 고즈넉하게 빛을 내는 곳은 단연 보니파시오다. 코르시카 섬 최남단에 위치한 이곳은 석회암으로 이뤄진 천연 단애가 절경일 뿐 아니라 마을 전체를 감싸는 바다 빛이 장관이다. 그리스 작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서 “유리시스 일행이 ‘정교하게 깎인 이중 절벽’에 부딪치다”로 해안 동굴을 묘사하는 등 문학작품에 배경으로 종종 등장하지만 보니파시오는 벼랑에 핀 꽃처럼 다가가기가 그리 만만치만은 않은 곳이다.
프랑스 영토에 속하는 코르시카 섬은 유럽에서 시칠리아, 사르데냐 다음으로 큰 섬이다. 면적은 8,772평방 킬로미터이고, 섬의 북쪽 카피코르수(Capicorsu)에서부터 남쪽 카푸 페르투사투(Capu Pertusatu)까지는 183킬로미터이며, 동쪽부터 서쪽까지는 80 킬로미터이다. 이 섬에서 제일 높은 산은 편암석으로 되어있는 2,710미터의 몬테 친투 쿨미네(Monte Cintu culmine)다. 수치로 보는 면적은 그리 크지 않지만 대부분 산악지대여서 생각보다 넓다. 아울러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는 있으나 자동차로 이동할 때는 그 어느 곳보다도 조심스럽게 운전을 해야만 한다.
아작시오나 칼비 혹은 바스티아 등 몇몇 도시를 제외한 대다수 마을들은 산 중턱이나 고원지대에 집중적으로 밀집해 있다. 성당과 집, 자그마한 상점들이 산속에 포근히 안겨 있듯 올망졸망 모여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섬이기 때문에 해안가로 들어오는 외부 침입을 피하기 위해 높은 산 위로 올라가게 되었을 것이라는 게 이곳 사람들의 말이다. 예전에 그렇게도 처절한 상황에서 형성된 마을이 오히려 지금은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절묘한 풍경으로 바뀐 것이다.
코르스 섬은 프랑스에 속하지만 프랑스다운 분위기는 전혀 없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도 전통적인 샹송이나 요즘 유행하는 곡이 아니다. 가수가 아니더라도 코르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이 잔뜩 배어있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그들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용암을 품어내듯 부르는 노래를 듣노라면 일순간 감정이입이 되면서 눈물이 어릴 만큼 구슬프다. 노래를 잘 부른다거나 기교 있게 불러서가 아니다. 굴곡진 시간을 되새기며 깊게 팬 상흔마저 보듬어 안아 그들 섬을 지켜내려고 혼신을 다해 부르기 때문이다.
아울러 섬의 어느 곳에나 표지판은 이곳 언어와 프랑스어 두 개로 표기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대부분 군복 바지를 유행처럼 입고, 카페나 가게에선 혁명의 상징 '체 게바라' 사진을 볼 수 있다. 보니파시오로 가는 산길에 잠시 들른 작디작은 카페에도 코르시카를 위해 힘을 모았던 장군들이나 그들의 영웅들 사진 그리고 체 게바라 사진으로 온 벽을 장식하고 있을 정도다. 또한 어디를 가도 검은 얼굴에 하얀 띠를 이마에 두른 상징적 마크가 눈에 띈다. 늘 깨어있는 코르시카 인들의 정신적 투지를 나타낸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외부인들 침략이 많았던 이 섬은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뀐다. 선사시대 이후로 그리스 사람들이 섬사람들과 교역하며 포도와 올리브 작물 재배 등 문화를 접목시키고, 이어서 로마가 이 섬을 장악하게 된다. 중세 초기에는 게르만 족이 이곳을 지배하고, 774년 샤를르마뉴 때 교황청 소속의 지역이 되지만 사라센이 이곳을 점령하고, 몇 번에 걸쳐 뺏고 되찾는 일이 계속되다가 1016년 제노바 인들과 피사 인들이 들어오게 된다.
1077년 교황 그레고리 2세가 코르스 책임자로서 피사의 주교를 임명하지만 제노바 인들이 재차 침입하고, 1296년에는 보니파스 8세가 지금의 스페인에 해당되는 아라공 왕에게 코르스의 통치권을 준다. 그러나 제노바 인들이 섬의 일부를 차지하여 이주 식민지 정책을 펴면서 중앙통치에 맞선다.
1405년 아라공 왕의 동맹자인 빈센텔루 디스트리아가 세 척의 범선을 이끌고 와서 제노바로부터 코르스를 되찾으려 했지만, 이미 보니파시오 이외의 전 지역을 장악한 제노바 인들은 패전해 시칠리아 섬으로 도주한 빈센텔루를 처형한다.
1453년에 제노바는 코르스에 힘과 권력을 지닌 은행을 설치하고 새로운 정책을 편다. 이들은 섬 주민들의 관습과 언어 등 모든 것들에 대해 존중해 준다는 명목으로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지만, 대혼란이 일고 제노바는 결국 섬에 대한 행정적인 업무를 철회한다.
이즈음 프랑스의 앙리 2세가 혼란과 무질서가 계속되는 코르스를 평정하고 1559년 제노바에게 돌려준다. 일시적으로 삼피에루의 반란이 있었지만, 그것을 제압하고 1569년부터 1729년까지 제노바는 코르시카 섬에서 절대적인 힘을 과시하게 된다. 하지만 끊임없이 제노바 인들에게 반기를 드는 혁명의 기운이 번지자 독일인까지 코르시카의 왕을 자처하며 들어오는 우스꽝스러운 사태가 발생한다.
마침내 코르시카 출신의 장군들이 제노바와 그 이외의 나라들에 대해 혁명과 독립의지를 표명하고, 파스쿠알레 파올리(Pasquale Paoli)는 코르시카 인들의 자체 최고 통치자가 되어 1763년 독립을 선포한다. 그는 코르티 대학과 국립 인쇄소를 만들고, 화폐개혁과 농업 장려 등 여러 정책을 펴지만 불안을 느낀 제노바 공국은 1768년 5월 15일에 프랑스에 코르시카 섬을 2백만 리브르에 팔아버린다.
코르시카 사람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격렬하게 항전하지만, 루이 15세는 유럽에서 가장 큰 부대 3만 명을 보내 내전을 일단 마무리시킨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코르시카 섬에는 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프랑스에 대해 자치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상태이다.
보니파시오는 프랑스의 영웅이자 황제였던 나폴레옹이 태어난 중부의 아작시오에서부터 자동차로 4시간가량 달려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투쟁으로 점철된 코르시카 역사의 편린은 보니파시오에도 뿌려질 수밖에 없었다.
천연 석회암 고원지대로 이뤄진 보니파시오는 그 자체가 잘 다듬어진 요새와도 같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으므로 수차례 점령국이 바뀌고 침입한 외지인들에게 약탈되거나 파괴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그런 중에도 오히려 침입을 ‘통쾌한 전설’로 만든 것이 <아라공 왕국의 계단>이다. 187개로 이어진 계단을 보노라면 보니파시오 사람들의 강한 의지와 지혜를 느낄 수 있다.
<생 바르텔레미 우물>이라고 불리는 동굴 진입로로 연결되는 이 길은 윗부분이 돌출된 단애를 사람이 한 계단 한 계단 다듬어 만들어 놓은 모형 같은 곳이다. 1420년에 코르시카 전체를 통치하고자 했던 아라공의 왕 알퐁소 5세가 보니파시오를 정복하려 했지만 보니파시오 인들이 저항한다.
적군이 그곳으로 몰래 오르기 위해 밤마다 단애를 파며 계단 길을 만든다는 계획을 미리 알아챈 마을 주민들은 오히려 그들을 역습한다. 그리하여 알퐁소 5세를 비롯한 아라공인들은 패배를 인정하며 떠나고 이 계단은 보니파시오의 명물이 된다는 일화다.
이제는 과거의 혼란과 상흔마저 마을에 절절이 녹아들어 평화로움만이 감돈다. 석회암 단애 빛과 주황빛 지붕 그리고 지중해 바다 빛이 어우러진 풍경의 한가로움은 시간의 흐름마저 멈추게 하는 힘으로 전해진다. 비탈지고 좁다란 골목을 걸을 때도, 해안가에 구슬처럼 이어져 있는 집들과 가게 앞을 지날 때도 번잡스럽거나 낯설지 않다.
단조로운가 하면, 사람들 오가는 술렁임도 가늘게 느껴지고, 어느 동네나 중심에 자리한 성당, 밀랍 인형으로 꾸며진 역사박물관, 거무숙숙 바람 때가 잔뜩 묻어 연륜을 드러내는 건축물이 늘어서 있다. 기획 공연장과 미술관 등은 물론이고 초록빛이 도드라진 잔디가 펼쳐져 있는 골프장과 보니파시오 인근의 그림 같은 섬들에 다가갈 수 있는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선착장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역시 감초처럼 어느 동네에나 볼 수 있는 묘지를 빼놓고 갈 수는 없어 말끔하게 정돈된 공동묘지에 들어가 어느 시대를 살았을지도 모르는 영혼들에게 침묵의 인사를 건넨 후 묘지에서 나온다.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식당을 찾다가 경사진 언덕에서 먹음직한 해물 그림이 눈길을 끄는 ‘다 세르지오(DA SERGIO)’라는 레스토랑을 발견한다.
작은 공간을 어찌나 살뜰하게 꾸며 놓았는지 식당을 찾은 사람들은 실내 장식을 카메라에 담기 바쁘다. 영국과 벨기에 등지에서 온 여행객들은 식탁을 가득 채운 향토 음식과 향 깊은 포도주를 보며, 연신 탄성을 내며 미소로써 주인에게 찬사를 보내며 시장기를 달랜다.
숙소가 있는 아작시오로 출발하기 전에 저녁 햇살을 한껏 받으며 보니파시오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향했다. 절벽처럼 깎인 단애 위에서 내려다보는 정경 또한 절미하다. 해안가를 맴도는 바다가 하늘빛 물비늘을 일으키며 바위들을 어루만지듯 일렁이고 코발트 빛 하늘엔 목화솜 같은 구름이 여린 음악처럼 흐르고 있다.
간간이 바닷물 해안에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산사에 퍼지는 청아한 풍경의 울림처럼 맑고, 바람 살랑일 때마다 싱그러운 기운이 퍼져 나간다. 천연의 지형 자체가 절묘하게 휘어지고 깎여져 신비롭기만 한 동굴과 단애, 해안부터 고원지대를 아우르는 바다는 보니파시오만의 빛, 언제나 살아 숨 쉬는 투명한 빛깔을 지켜줄 것이고 이곳을 찾는 사람에게도 오염되지 않은 신선한 기운을 전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