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문 앞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시리다. 농익은 과실처럼 빛깔 곱던 가을은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고 찬물 번져가듯 도시에 냉기가 가득하다. 이런 때는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더욱 그립고 정겨운 거리도 빛바랜 사진처럼 떠오르곤 한다. 그리움 깊어가면서 항상 내 마음의 뜰 안에 있는 것 같아 지나치곤 했던 파리의 몇몇 지역들을 찬찬히 어루만지듯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센 강 한가운데 동그마니 떠 있는 섬 <생 루이>가 환한 등대처럼 차올랐다. 나는 이 섬이 파리 중심에 있으면서도 제 빛깔을 고고하게 지니고 있어 ‘은은한 진주’와 닮았다고 생각하며, 이곳에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몽상에 잠길 수도 있기에 ‘꿈꾸는 섬’이라 부르고 싶다. 이 섬에 오는 사람들은 연초록 이끼 오른 석회암 건축물이 가로수처럼 늘어선 골목길에서 아늑함과 고요를 느낄 수 있고 둥근 철판에 연신 노릇노릇 구워 내는 뜨거운 크레프에 잠시나마 작은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
생 루이 섬은 17세기 때, 크리스토프 마리가 주도해서 대공사를 시작하고 당대 최고의 건축 설계 전문가 루이 르 보에 의해 다듬어진다. 알렉산더 뒤마의 소설 『철가면』을 허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들 때, 배경이 된 보 르 비콩트 성과 태양왕 루이 14세 당시 베르사유 성을 건설하여 재능을 인정받은 건축가 르 보는 이곳에 살며 단아한 건축물들과 더불어 해바라기를 닮은 시계와 종루가 돋보이는 섬의 유일한 교회 생 루이 앙 릴 성당을 짓는다.
명성 있는 건축가들에 의해 조성된 17세기 바로크 고전주의 풍과 18세기 건축물이 많아 때로는 고급 주택가로 불리기도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이곳이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은 아니다. 생 루이 섬은 다른 마을, 다른 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저만의 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꿈꾸는 섬은 파리를 가로 흐르는 센 강의 중앙에 자리하므로 섬의 어느 곳에서도 그림 같은 도시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다. 섬 주위를 흐르는 강을 따라 산책로를 한 바퀴 걷다 보면 파노라마 같이 변화하는 파리가 따라온다. 우안의 르네상스 풍의 시청사와 좌안의 고풍스러운 건축물들, 바스티유 지역과 연결되는 동쪽 풍경, 특히나 바로 옆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는 시테 섬은 잘 편집한 영상처럼 아른거린다.
생 루이 섬엔 좌·우안, 육지로 이어지는 다리가 네 개, 시테 섬으로 연결되는 다리가 한 개 있어 도드라진 이미지들에게 다가가고 싶을 때는 얼마든지 그 구역으로 갈 수 있다. 센 강가로 내려가는 계단도 있어 깊은 시름에 잠기거나 사색을 즐기는 사람들 혹은 연인들은 곧잘 애용한다. 섬의 에움길에서 플라타너스와 미루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면 평화롭기 그지없다.
섬 안 골목길들은 어디나 정답다. 그리 높지 않고 균형 있게 지어진 집들이 바람도 추위도 막아 주기 때문에 한참을 걸어도 지치지 않는다. 운치 있는 건물들 아래쪽 상점엔 갖가지 종류의 물건들이 요술봉으로 톡톡 건드리며 빛깔을 바꾸듯이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다. 독특한 간판들과 전혀 다른 품목으로 이어진 가게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조화로운지! 작디작은 액세서리 하나, 인테리어 소품 하나도 디자인이 특이해서 눈길이 간다. 예술가들이 사랑한 섬답게 갤러리와 골동품 가게들도 적지 않아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물론 문외한들에게도 잔잔한 기쁨을 준다. 아무것도 사지 않아 손이 비어도 마음은 넉넉해지는 것이 섬 골목길들의 특징이다.
생 루이 앙 릴 길에 들어서면 더욱 그렇다. 달궈진 철판에 묽은 밀가루 반죽을 얇게 구워 과일 잼, 초콜릿, 바나나 등 속을 넣어 먹는 크레프 버터향이 그렇게 고소하고 달콤할 수가 없다. 주인의 정갈함을 느낄 수 있는 하얀 옷과 빳빳한 흰 모자가 부드럽고 바삭한 크레프를 만들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 손놀림과 어우러져 그것을 맛보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옆으로는 자그마한 레스토랑들과 포도주, 프아그라, 과일가게 등이 늘어서 있고, 섬의 명성을 더 해주는 전통의 아이스크림 집 베르티용이 31번지에 자리한다.
가을 봄 여름은 물론 옷깃 여미는 추운 겨울에도 다양한 향과 깊은 맛이 일품인 아이스크림이 단연 인기다. 아울러 프랑스인들이 자신들 조상이라 여기는 골루와 사람들 먹거리였던 익히지 않은 풍성한 야채와 손잡이가 달린 투박한 잔에 포도주를 가득 채워 한 상 차려주는 전통식당들도 눈길을 끈다. 이 섬의 모든 것들은 화려하거나 초라하지 않고, 요란하거나 북적임이 없어 생 루이 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엔 촛불 일렁이듯 따뜻함이 스민다.
그래서 그런지 유난히 예술가들이 이 섬을 많이 찾는다. 19세기 상징주의 시인이며 미술 평론가였던 샤를르 보들레르가 이 섬에 머물렀고, 천재 조각가라고 불리는 까미유 클로델이 그랬다. 시인이자 희곡작가인 폴 클로델의 누나이며 로댕의 연인이기도 했지만, 짧은 사랑 끝에 그로 인해 긴 시간 아파해야 했던 ‘연민의 여인’ 까미유가 한동안 지냈다는 집의 현판을 저녁노을이 환히 비추고 있다. 작가들의 삶은 그렇게 타오르다 사위는 불꽃처럼 황홀한 노을에 반사되다 사라지는 섬광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이 섬을 사랑한 많은 예술가들이 하늘과 센 강 그리고 골목길마다 배어있는 섬의 숨결을 느끼며 작품을 구상하고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잠겨 시테 섬이 보이는 곳까지 걷는다.
생 루이 섬에 올 때마다 즐겨 찾는 찻집 앞에 서니 미풍에 연기가 흐느적대며 하늘로 오르는 듯한 재즈음악이 들린다. 생 루이 다리 위로 다가가자 사람들이 바닥에 앉거나 선 채 연주를 듣고 있다. 평균 50대 중반인 악사들은 몇 명 되지 않는 청중 앞에서 무척 진지하다. 연주가 끝나고 박수를 치는 사람 중에 누군가가 신청 곡을 부탁하자 즉흥 연주를 했고, 미국에서 왔다는 스무 살 남짓한 여학생은 초로의 연주자들의 음악에 맞춰 구슬프게 때론 기교를 넣어가며 노래 부른다. 해질 무렵이라 찬기가 감돌았지만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은 채 듣고 있다. 황혼 빛에 물든 섬의 절경과 분위기가 너무 아릿해서 가슴 한복판이 싸르르 저려온다. 우리, 마음 여린 사람들의 하루가 또 이렇게 지고 있구나! 노래와 연주가 끝나자마자 그들의 열정에 사람들은 박수를 쳤고 열띤 공연에 비하면 적긴 하지만 동전을 그들 모자에 넣어 준다.
단풍 닮은 노을이 하늘에 번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내 어둠이 주위를 메우기 시작한다. 연주자들은 악기를 정리하고 사람들도 서둘러 제 갈 길로 흩어진다. 나는 발걸음을 옮기기 전, 시테섬을 바라본다. 시테 섬에 자리한 노트르담 대성당에 서서히 조명이 들어오면서 정교하게 건축된 성당 뒷면이 고딕 양식의 진수라고 하는 것에 공감한다. 3백여 년에 걸쳐 수많은 장인들의 재능과 정성으로 만들어진 인류의 문화유산, 황금빛과 초록빛이 그곳을 절묘하게 비추며 그림자가 강물 위에 어리니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그 고운 빛과 장엄함을 가장 잘 보고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여기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도심 속 쉼터는 자신이 지닌 고아함과 소박함은 물론 다른 곳의 아름다움도 함께 감싸 안고 사람과 자연의 조화를 꿈꿀 수 있는 섬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존재해 왔고 언제까지나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로부터 변함없이 사랑받을 생 루이 섬에도 어느새 꿈길 밝혀 줄 등불 하나 둘 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