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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 May 18. 2024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회사 근처의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다. 처음 시작은 몰입하는 경험을 하고 싶어서였다. 누군가가 잡생각을 잊기 위해 드럼을 배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은 후 나도 악기를 하나 배워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초등학생 이후로 손을 놓았던 하얗고 매끈한 건반위에 조심스레 손을 다시 올려 보았다. 


복수전공으로 들었던 심리학 수업에서 ‘몰입(flow)’ 라는 개념을 창시한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에 의하면 몰입은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버겁지도 않은 일” 을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하나의 과업만을 진득히 붙들고 있기 힘든 시대이지만, 나에게 바로 그런 일이 피아노 배우기 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첫 수업 전날 급하게 기본 계이름을 벼락치기로 외워갔다. 처음엔 좋아하는 영화 라라랜드의 OST를 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자연스레 클래식 피아노가 아닌 재즈 피아노 커리큘럼을 선택했다. 평소 책을 읽을 때 재즈를 즐겨 들었는데, 그러다보니 쳇 베이커, 엘라 피츠제럴드, 듀크 조던 등 좋아하는 재즈 음악가들이 생기기도 했고. 엄마가 억지로 보낸 학원에서 하농과 체르니를 치며 포도송이들을 숱하게 칠해 봤으니, 어른이 된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배울 것은 재즈여야만 했다. 


재즈스러움을 배우는 과정 

기초적인 코드에 대해 배운 이후, 재즈리얼북* 악보를 보며 재즈안에서의 룰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 가장 놀랐던 것은 악보에 왼손 계이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보통 클래식 곡들은 왼손은 낮은음자리표, 오른손은 높은음자리표로 나뉘어져 음을 하나씩 치며 화음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재즈 악보에서는 왼손은 작게 표시된 코드를 참고해, 재즈 보이싱, 텐션, 대체코드 등 다양한 방법을 이용하여 나만의 느낌을 완성해나가는 작업이다. 코드라는 룰 안에서, 자유롭게 멋진 조합을 만든다. 작곡가의 연주를 찾아 들어보면 당황스러울 정도로 악보에 나와있지 않는 자신만의 기교가 가득하다. 그러니까, 재즈에는 정답이 없다. 


(*재즈리얼북이란 미국의 유명 재즈 스탠더드 곡들을 리드시트 (곡을 이루는 핵심 코드, 멜로디가 있는 기본 악보) 로 모아놓은 악보집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의 곡을 “재즈스럽게” 만드는 과정은 생각보다 매우 복잡하고 어렵다. 피아노를 배운 첫 주, 내 일기장에는 “좌뇌와 우뇌를 꺼내서 저글링을 하는 느낌” 이라고 써있다. 선생님께 재즈피아노 치는분들 정말 대단하고 똑똑한 것 같다고 혀를 내두르며 투정아닌 투정을 부렸다. 그러자 선생님은 “제가 수현님 회사에 가서 일을 처음부터 배운다고 생각해보세요. 저도 하나도 못 할 거에요." 라고 답한다. 재즈는 원체 다른 악기들과 합을 맞추는 것이 중요해서 그런가. 이런 겸손과 배려까지 갖춘 대답이 돌아올 줄이야.


무용한 것의 유의미함 

“난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중 김희성이라는 인물의 유명한 대사다. 


이 대사를 들으며 희성의 취향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산과 바다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재즈 듣는 것을 좋아하다 이제 피아노를 더듬더듬 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생존’하는데 큰 작용을 하는 일들은 아니니 무용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독서모임과 글쓰기모임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심을 넓혀가고, 직접 쓴 글을 기고해보기도 하며, 산과 바다를 통해 마음을 치유하고 영감을 얻기도 한다. 


커다란 틀이 있다는 것에 안정감을 느끼며 또 그 안에서 나만의 자유로움과 개성을 찾는 일. 사실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이 그런 것 아닐까. 재즈 매니아로 알려진 무라카미 하루키가 글쓰는 법을 음악의 리듬에서 배웠다고 말했듯이,  큰 틀 안에서 자신만의 코드 진행을 만들기. 어울리는 하모니를 찾아나가기. 정답은 없다. 사실은 무용해보이는 것도 그리 무용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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