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6월의 어느 날 - Sarp 국경 통제소
- 나는 리제의 어느 병원에서 PCR 테스트를 받았다. 살 떨리는 6시간의 기다림 끝에 받아 든 결과지에는 다행히 음성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제 이 음성 결과를 가지고 72시간 내 국경을 넘으면 된다. 그 말인즉슨, 마침내 터키와 작별 인사를 할 때가 다가왔다는걸 뜻했다.
Sarp 국경통제소를 16km 정도 남겨둔 시점에 나는 자전거를 멈췄다. 근처 해안에 텐트를 치고 오붓하게 터키에서의 마지막 하룻밤을 보낼 생각이었다. 해안에는 이제 막 자리를 정리하고 떠나려는 가족 나들이객이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음식을 나눠주었다. 숯불에 구운 닭고기와 말린 과일, 에크맥, 달콤한 디저트, 수박 1/4통 등. 음식이 가득한 꾸러미를 받아 든 나는 그저 감개무량했다. 고마운 마음을 어찌 표현할 길이 없어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터키에서 수없이 경험한 일이었지만 매번 이런 일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건 매번 그들의 진심이 전해져 오기 때문은 아닐까.
사실 이런 일은 유럽을 여행할 때는 좀처럼 없던 일이었다. 유럽 사람들은 예의가 있고 친절했지만 가진 것도, 지켜야 할 것도, 할 것도 많은 그들에게 외부인을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개인주의는 그들의 마음에, 물질주의는 그들의 보금자리에 단단하고 높은 울타리를 세웠다. 그때 당시 나는 이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치부했다. 팔은 안으로 굽듯 사람은 결국 자기 울타리 안에 있는 것들만 돌보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이런 생각을 감출 수 없었다. 사람들은 더 가질수록, 더 바빠질수록, 더 편리해질수록 심지어는 더 행복해질수록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바깥세상에는 더 무정해져만 간다고. 배고픔을 모르는 작가에게서 더 이상의 훌륭한 문학 작품을 기대할 수 없듯이, 뚱뚱하고 안락한 이에게 타인에 대한 연민을 기대할 수 없다고.
언제부턴가 나는 이런 비정한 현실에 지쳐버렸고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점점 잃어갔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다가 필요할 때만 타인을 찾는 사람들, 인간관계에서 이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 사람을 인성이 아닌 능력과 가진 것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하지만 이런 수많은 사람 속 나를 가장 실망케 하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나 자신이었다. 나 또한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과 다를 게 없는 속물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터키는 정말이지 마지막 순간까지 한결같았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이 나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건 없이 베푸는 걸 멈추지 않았다. 단순히 음식뿐만이 아니다. 터키인들은 종종 자신의 소지품을 내게 선물하곤 했다. 내 가방에는 그렇게 받은 안경이라든가 팔찌, 손목시계, 반지 등 선물들로 가득했다. 그건 정말이지 순수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단지 선물을 주면서 "이걸 보면서 나를 기억해줘."라고 말할 뿐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터키에 갇히게 된 건 사실 내게 불행이 아닌 축복에 가까웠다. 나는 이 길고 험난한 여정 속에서 평생을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친절과 호의를 받았다. 그리고 그 친절과 호의는 세상과 사람을 점점 부정적으로 보려고 하던 내게 넌지시 알려주었다. 네 마음을 먼저 열어 사람을 믿고 사랑하라고.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을 세상에 돌려주라고. 그것만이 내가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자, 내가 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기에.
터키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신기하게도 '터키의 한결같음'은 이날까지 계속되었다. 오밤중에 내 주위를 떠돌던 검은색 들개 한 마리가 음식을 좀 나눠준 것을 계기로 나를 줄기차게 따라왔다. 녀석은 마치 국경통제소로 나를 인도하듯 내 앞에서 힘차게 달렸다. 가끔 뒤를 돌아보며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터키의 들개는 조금만 잘해줘도 사람을 따라온다. 왜 그런 걸까? 외로워서 그럴까, 아니면 좋은 주인을 만나 편하게 살고 싶은 걸까? 나에게 이건 터키를 여행하는 내내 미스터리와도 같았다. 만나자마자 머리를 들이밀고 훌러덩 배를 내보이는 녀석들에게 경계심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터키에 온 지 472일이 지난 지금에서야 난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터키의 들개는 터키 사람을 닮았다. 털이 복슬복슬한 것도 강인해 보이는 것도 때때로 보여주는 그 깜찍한 제스처도 모두 터키 사람과 붕어빵이다. 무엇보다 녀석들은 터키 사람이 그렇듯 사람을 무진장 좋아한다. 좋으니까 따라오는 것이다.
국경통제소 바로 전의 마을, 케말파샤에서 나는 그 검은 개를 음식으로 유혹하며 뿌리쳤다. 이 짓도 이제는 못 할 짓이다. 내가 없어도 녀석은 알아서 잘 살아가겠지만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5km 가까이 늘어진 화물 트럭의 행렬을 뚫고 마침내 Sarp 국경통제소에 도착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나는 국경통제소 안으로 쉬이 들어갈 수 없었다. 오늘은 국경을 넘는 날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심판의 날이기도 했다. 나는 터키에서 일 년 넘게 불법체류를 했다. 어떤 대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나는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국경통제소 안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불법체류를 하셨네요?”
통제소 직원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미리 준비한 답변을 그에게 전했다.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떠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이렇게 국경이 다시 열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요.”
“사정은 딱하지만 불법체류는 불법체류입니다.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세요.”
두 가지 중 하나라고? 설마 감옥에 가는 것 또는 벌금 천만 원, 이런 건 아니겠지? 나는 긴장했고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오 년 동안 터키 입국을 금지당하거나 아니면 벌금 1,300리라(한화 15만 원 정도)를 내고 아무 일도 없던 일로 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나는 재빨리 잔머리를 굴렸다.
‘오 년은 긴 시간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오 년 안에 터키에 돌아올 것 같진 않다. 그렇긴 해도 1,300리라면 나쁘지 않은 벌금이다. 내가 여기서 공짜로 얻어먹은 것만 해도 1,300리라, 아니 13,000리라는 능히 상회하지 않는가. 사실 이건 말이 안 된다. 일 년짜리 장기 체류 비자를 신청하는데도 이 정도 비용은 들어가니까.’
나는 기꺼이 벌금을 내기로 했다. ATM에서 현금을 뽑을 때 수수료를 5%나 떼어가는 걸 보고 잠시 기계 앞에 서서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쏟아부었지만 이후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터키 국경을 빠져나온 후, 나는 별다른 문제 없이 조지아 국경도 통과할 수 있었다. 국경통제소의 조지아 사람들은 얼핏 외모만 봐서는 터키인들과 구별이 가진 않았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덜 친근하고 덜 부드러운 느낌. 기분 탓이려나. 아니,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다. 세상 어디를 가도 터키인처럼 친절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
국경을 넘은 후, 나는 비를 피하기 위해 잠시 버스 정류장의 처마 밑에 머물렀다. 국경 하나 넘었을 뿐인데 모든 게 너무나도 낯설고 어색했다. 나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털북숭이 남성도, 히잡을 쓴 여인도, 길 잃은 들개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모스크 대신 동방정교회의 교회가 근처에 우뚝 서 있었다. 뜻은 몰라도 읽을 수는 있는 터키어 대신 산스크리트어처럼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꼬불꼬불한 조지아어가 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이곳은 불과 반 시간 전에 내가 있던 곳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같은 게 있다면 그건 오직 하늘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뿐이었다.
나는 국경통제소를 들락날락하는 차량을 바라보다가 자전거에 올라탔다. 이상하게도 떠나는 아쉬움이 그리 크진 않았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설렘이 커서 그랬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 이제는 등 뒤로밖에 보이지 않는 터키가 조금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막역한 친구의 집처럼 느껴졌다. 언제든 갈 수 있는 곳, 언제나 나를 반겨주는 곳, 사람과 동물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곳, 그리고 언젠가 꼭 다시 방문할 곳.
나는 자전거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속삭였다.
잘 있어, 터키. 촉 테쉐큘레르.
(Cok Teşekkürler, 정말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