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문득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을 떠올렸다.
오십 넘도록 살면서 제대로 된 자기반성이나 참회를 한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보았다. 참회나 반성이라는 말보다는 오만과 독선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삶을 살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오히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후회는 있었다.
어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제대로 소리 내어 마음껏 웃었던 때가 언제였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화내고 열 받고 좌절한 기억이 더 많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면서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학창 시절 나는 유머가 많은 녀석이었다.
친구들과 모이면 우스개 소리로 분위기 메이커를 자청했고 아내도 나의 유머러스함을 좋아했다 한다.
한때는 아내와 둘이서 별것 아닌 일에도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웃으며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랬던 나는 어디로 가고 또 다른 내가 찾아왔다.
대화가 사라지고 웃음도 사라졌다.
가정에서는 찬밥신세로 전락했고 직장에서는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스샷 마냥 경직된 표정으로 기계적인 언어를 쏟아내며
가끔씩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사람 같은 대화를 전화통에 해대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직장에서의 업무적인 스트레스는 절대 집에까지 들고 오지 않겠다는 신념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한때는 아내의 직장 생활의 일상을 들어주는 일조차 남의 일처럼 귓등으로 들었다.
아내는 이야기한다.
"당신은 너무 화가 많아요"
나는 지지 않고 응수한다.
"당신이 분노 조절이 안돼."
지루한 싸움은 시작되었고 대화 없는 일상과 웃음기 사라진 가정의 발로였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다시 일상은 돌아오고 삶은 계속되지만 사라진 웃음과 대화는 제자리로 돌아올 기색이 없다.
"갱년기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핑계인 것만 같다.
내가 이 집의 가장이고 우리 가족의 분위기 메이커인데 이럴 수는 없다는 오기가 생긴다.
그래. 소곤소곤 이야기해보자.
하하하 웃어보자.
마누라도 웃고 우리 두 딸도 같이 크게 소리 내어 웃도록 내가 먼저 웃어 보리라.
직장에서 화낼 일이 있어도 꾹 참고 슬며시 웃어 주리라.
오늘도 내일도 잘 닦여진 거울 앞에서 환하게 웃어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