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미덕은 도시농부의 로망이다
주말농부일기(5월 27일 -28일)
비 예보가 있는 주말은 농부에게는 휴식을 주고 작물에는 수분을 공급할 수 있는 하늘이 주는 선물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집으로 돌아오는 일요일 오후까지 기대한 만큼 충분한 비는 내리지 않았다.
마누라가 지리산 무박종주를 가는 바람에 부처님 오신 날에 절에 갔던 연례행사도 건너 띄었다.
토요일 오전 청도 본가에 도착해서 상추 뜯어 넣고 된장에 고추장 넣고 쓱쓱 비빈 비빔밥 한 그릇 먹고 나니 기운이 났다. 가만 생각해 보니 본가에서 지금까지 내가 주로 하는 일이 밥 먹는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씩 텃밭에 농약도 치고 힘쓰는 일을 한 번씩 해 드리고 나면 마지막엔 항상 엄마표 집밥을 거르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엄마가 내게 가장 자주 하시는 말씀도 밥 먹으라는 말씀이었다.
엄마는 내가 밥 달라고 하면 한 번도 직접 차려 먹으라거나 싫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내가 밥 먹는 동안 엄마는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아서 자반을 발라 주시거나 동네 이웃의 소소한 이야기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말씀하신다.
문득 부모님 댁 처마에 둥지를 틀고 사는 새끼 제비가 어미 제비의 먹이를 받아먹는 모습이 오버랩되어 목이 메었다.
어제는 내가 점심을 먹으면서 지나가는 이야기로,
"엄마, 보청기 하나 하십시다. 내가 답답해서 안 되겠어요"하고 말씀드렸다.
엄마는 일언지하에 싫다고 하셨다. 예전에 외할머니 보청기를 내가 해드렸는데 한 달도 안 쓰시고 그만두신 얘기를 하시며 비싼 거 하면 돈만 많이 들지 않냐고 하셨다.
그리고 엄마는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너네가 그리 답답한데 나는 얼마나 답답하겠냐'라고.
그렇다. 나는 나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보청기를 하자고 말씀드렸지만 진정 불편하고 답답한 사람은 엄마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점심 식사 후 엄마를 모시고 밭에 갔다.
날씨도 좋지 않고 할 일도 별로 없으니 쉬시라고 했지만 동네 이웃에서 얻은 검정콩 모종을 심어야 해서 밭으로 향했다. 엄마는 콩을 심고 나는 물을 듬뿍 주었다.
콩심기가 끝나고 엄마는 돗자리에 말리던 겨울초 씨앗을 털어서 보자기에 모으셨다. 무엇이든 허투루 버리시는 게 없으신 분이다.
엄마를 모셔다 드리고 고추밭에 진딧물과 총체벌레를 방제하는 약을 치고 있으니 처남 부부가 왔다.
우리는 의기 투합하여 처남이 가져온 막걸리에 밭에서 자란 부추와 깻잎으로 전을 부쳐 즉석에서 막걸리 파티를 하기로 했다. 처남댁이 뚝딱 부추전과 깻잎 전을 만들어 냈다.
우리는 밭에서 딴 민트잎을 막걸리에 가득 넣어 칵테일 "모히또"를 흉내 낸 "막히또"를 만들어 마셨다.
진한 민트향이 입속에서 느껴졌다.
처남 부부는 저녁거리로 냉면 재료를 챙겨 왔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냉면재료와 얼음덩어리가 들어있는 육수를 넣고 금방 냉면이 만들어졌다.
참, 편리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중국집이나 냉면전문점에 가야 먹을 수 있는 냉면을 이렇게 손쉽게 만들 수 있다니 말이다.
맛난 저녁까지 먹고 처남부부가 떠난 후 어슴프레 저녁이 왔다. 하늘은 하루 종일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뒷짐을 지고 밭을 한가롭게 거닐었다.
꼬꼬마 양배추와 브로콜리는 수확해도 될 정도로 자랐고 일반 양배추와 자색양배추는 결구를 이루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완두콩은 콩깍지가 달려 영글어가는 중이었다.
단호박도 어느새 앙증맞은 애호박을 맺었고 감자도 메추리알만 한 아기 감자를 달고 있었다.
진한 노랑의 달맞이꽃에 꽂혀 망중한에 빠진 사이에 지리산에 갔던 아내의 톡이 도착했다. 세석평전의 만발한 철쭉꽃이며 지리산 천왕봉 정상석을 배경으로 한 완주 기념사진을 보내왔다.
나는 속으로 "대단한 마누라군"하며 감탄했다. 30킬로미터가 넘는 산길을 이틀에 걸쳐 걷는다는 건 실로 누구나 할 수 없는 도전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을 운무 때문에 못 보았다니 새삼 지리산 등반 한 번만에 일출을 만난 나는 행운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요일 아침에 온 밭이 촉촉이 젖은 걸 보니 밤새 비가 다녀간 모양이었다.
감자밭에 복합비료로 추비(웃거름)를 주고 칼슘제를 물에 타서 뿌렸다.
날로 줄기가 높아 가는 덩굴성 콩과 완두콩의 지지대를 더 높이 만들어 주고 수박과 참외의 지지대를 새로 만들었다.
오후에 비가 오기 전에 지인들과 나눔 할 상추와 양배추, 그리고 브로콜리를 수확하려고 마음먹으니 손길이 바빠졌다. 야채를 포장하면서 나눔 할 분들이 맛있게 드실 거라고 생각하니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두 분은 직접 방문해서 전달해 드렸다.
삼 년째 '내 밭 내산'으로 수확한 작물과 야채를 가족친지들, 지인들과 나누어 먹으면서 나는 먹고 남는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남은 것을 우리가 먹는다는 것만은 꼭 실천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여담 하나 : 의도하지 않은 연리지
대문 사진에 나무가 무슨 나무일까요?
자세히 보시면 오른쪽은 매실, 왼쪽은 복숭아나무입니다.
저도 "세상에 이런 일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저희 밭 한 곳에 작년에 사다 심은 매실나무에서 벌어진 일이랍니다. 굵은 매실도 달려 있어요.^^
농부님들께 문의하니 매실나무를 개복숭아 나무에 접붙이는데, 접붙인 나무가 자라서 생긴 일이라고 하시네요.
복숭아나무를 잘라야 매실이 제대로 자랄 수 있다는데 우리 가족은 신기해서 그냥 키우기로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