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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담 Feb 06. 2024

딸들이 행복하면 나는 바보라도 좋아

feat.  딸바보

나이가 들 수록 남 밑에서 일하는 게 더욱 팍팍해지는 요즘이다. 칠순이 넘은 사업주는 며칠 전에도 내게 터무니없이 갑질을 하더니  오늘도 나를  불러놓고 욕지거리를 쏟아낸다.

머리가 하얘진다.  도망치고 싶다.


지난주에 아내에게 회사 때려치우고 여행이나 다니자 했더니 그녀는 몇 년만 더 참자며 자기도 오늘 상사한테 스트레스받았다며 나를 달랜다.

작은 딸 학교 마칠 때까지만 참고 다니란다.

당장 내가 열받아서 죽을 지경이구만 ㅠㅠ.


나는 퇴직하고 아내와 함께 캐나다 로키, 네팔 랑탕,

중국의 차마고도 트레킹을 다녀올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여건이 되면 호주의 태즈매니아 트레킹도 가고 싶다.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회사를 즐기지는 못하고 참고 다닌다는 표현이 정직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작은 딸은 뮤지컬이나 연극  등의 공연에 관심이 많다.

지난 1월 말에 통신사 할인으로 민우혁  배우가  나오는 레미제라블을 예약해 주었는데 너무 재밌게 봤다며 톡으로 후기를 보내왔다.

2월에도 공연이 있어서 정성화 배우가 출연하는 노트르담드파리를 예약해 주었다.

딸애는 너무 좋아 어쩔 줄 몰라했다.

나는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갖고 싶은 장난감을 사달라고 단식투쟁했던 기억이 떠올라 쓴웃음이 났다. 격세지감이다.


며칠 큰 딸이 잘 나가는 메이저리거 오타니 쇼헤이가 소속된 LA다저스팀의 메이저리그 개막전이 서울에서 열리는 데 보고 싶다며 톡을 보내왔다.

세계적인 프로야구 경기인지라 표 구하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큰 딸애가 취업 준비 중이라는 핑계로 내가 너무 무관심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큰 딸은 대학시절에도 둘째 딸과 지역 프로야구 연고팀의 져지를 맞춰 입고 둘이서 같이 야구장을 갔다. 야구 경기상식도 상당한 수준에 다다른  듯 보였다.


그래서 나는 큰 딸을 위해 그녀가 보고 싶어 하는 오타니 쇼헤이의  경기를 예약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어쩌면 무모한 도전이 될지도 모르지만.

메이저리그 정식 경기는 3월 20일부터 열리지만 3월 17일에 국내 프로야구팀과의 친선경기가 예정돼 있었다.


메이저리그 팀의 경기를 예약하려고 큰 마음먹었는데 초반부터 몇 가지 제약에 봉착했다.

모쇼핑몰 앱으로만 예약이 가능한데 예약자가 꼭 동행을 해서 신분확인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큰 딸을 위해서 서울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평일에는 직장 때문에 가기 힘들고  3월 17일에 있을 스페셜 게임을 예약하려고 마음먹었다.

정오에 시작하는 경기라 끝나고 대구에 내려가기도 안성맞춤이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예약만 남아 있을 뿐.


나훈아 콘서트를 예매하려다 몇  번이나 실패해 본 나는 모바일 예매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딸에게 꼭 예약해 주겠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했는데.

예약이 오픈되는 날 저녁, 나는 홀로 청도의 농막에서 칩거에 들어갔다.


어둠이 내리고 시간은 흘러 어느덧 약속된 시각 8시가 가까워졌다. 사방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고 시계의 초침은 8시 정각을 향해 쉬지 않고 달린다.

정각 8시.

모바일 창이 느려지고 대기 번호가 뜬다.

100번을 넘긴 숫자다. 코웃음을 쳤다.

"이 정도면 예약되겠는데"


나의 예상은 금방 빗나갔다. 대기번호가 1000번을 넘어가고 한참만에 예약화면에 접속했는데 좌석을 잡으면 선점한 자리라는 표시창이 뜬다. 몇 번을 헛손질하다 다른 구역으로 옮기고.. 다시 터치하고.

한겨울인데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두 자리를 예약해야 한다. 딸아이 자리와 내 자리의 두 개를 예약해야 하는 데 도대체 두 자리를 한 번에 예약하기가 힘들다.

"에라, 하나씩 하지, 뭐"

간신히 하나 예약했다. 이게 웬 떡 인가 싶었다.


다시 접속해서 나머지 한자리를 예약하려니 또 경고창이 뜬다.

'예약  횟수를 초과했습니다. 예약은 1회만 가능합니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뜯는 소리란 말인가?


그렇다. 한 번에 두 자리를 예약해야 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급히 예약한 자리를 취소했다.

다시 두 자리를 번에 예약하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그러한 나의 다짐도 아무 소용없이 거의 한 시간 만에 예약은 마무리되었다. 손가락에 쥐가 날 것 같았다.

나는 결국 예약에 실패한 것이다.


딸아이의 실망한 얼굴이 떠 올랐다.

나는 맥주를 마시며 무능력한 나를 자책했다.

이걸로 정말 딸아이와 오타니 쇼헤이의 조우가 무산되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약 사이트로 다시 미끄러져 들어갔다.


시간은 벌써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역시나 예매는 거의  끝나고 자리도 없었다.

그때 반전이 일어났다.

본부석 쪽의 4층 구역에 5자리가 한 번에 쏟아져 나왔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과 떨리는 손으로 두 자리를 예약하고 카드 결제까지 무사히  마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물론 연석은 아니지만 그래도 딸아이에게 아빠 체면은 세웠다.

큰 딸에게 예매 소식을 전했더니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그런데 아직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다.

둘째 딸은 자기도 함께 갈 수 없는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서운하다는 표현까지 써가며 나를 작아지게 했다.

그리고 한참만에 언니랑 잘 다녀 오라며 단념했다.


딸들을 위한 이 힘든 여정도 내게는 행복의 한 순간인 싶다. 성인이 된 그녀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줄 수 있다는 게 뿌듯하다.

그리고 두 딸들의 승승장구와 행복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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