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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아버지로 산다는 것

by 석담

어제는 우리 부부에게는 특별한 날이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첫째 딸에게 처음으로 밥을 얻어먹은 날이었다.


그동안의 어버이날에는 주로 손 편지를 써서 감사함을 전하던 딸이 자신의 능력으로 밥을 사줄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 다 컸다는 생각과 이제는 우리 부부의 품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큰 딸과 같이 밥을 먹으며 우리 부부는 딸에게 약간의 훈계(?)도 들어야 했다.

우리 부부가 제발 싸우지 않고 다정하게 지내고 매사를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구구절절이 옳은 이야기였다.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큰 딸은 이제 27살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또 다른 더 큰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공부까지 하고 있으니 이제야 철이 제대로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앞길에 좋은 일만 계속되기를 빌어 본다.

둘째 딸은 프랑스로 어학연수 가는 바람에 함께 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일상을 매일 sns로 보고 있다. 둘째는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를 이미 여행했고 방학을 맞아서 지금은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독일을 여행 중이다.


그녀가 보내온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에서의 일몰을 배경으로 한 인생샷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낯선 이국땅을 거침없이 돌아다니는 둘째의 용기가 가상하다.

문득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았던 나의 젊은 시절이 생각나 딸들의 미래에 대한 기대가 더 커졌다.


나는 딸들의 주민등록번호를 외운다.

물론 아내의 주민등록번호도 외운다.

그것은 내가 기억력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녀들의 주민번호를 외우는 것은 나의 남편으로서의, 아버지로서의 의무감 때문이다.


큰딸은 학창 시절 우리 부부의 속을 좀 썩였었다.

그래서 항상 아픈 손가락처럼 더 신경이 쓰이고 챙겨보게 되었다.

그때는 우리의 조언이나 질책도 흘려듣더니 이제는 철이 들어서 혼자서도 척척해내는 것을 보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나는 큰 딸에게 결혼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자기는 비혼주의자는 아니라는 답변에 나는 안도했다.

문득 사랑하는 사람이 빨리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그리고 한 가지 행복한 걱정거리가 생겼다.


딸의 결혼식에서 눈물이 나오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친척 딸의 결혼식에서 아버지가 눈물을 보이는 장면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러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보지만 눈물이 어디 다짐으로 해결될 것인가


어쨌든 나는 딸의 결혼을 기다리는 속물 같은 아버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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