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부터 내린 비는 어둠과 함께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켰다.
한잔 술에 세상이 어지러워질 무렵
나는 밤의 깊숙한 심연 속으로 빠져 든다.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의 아버지, 남편, 아들이라는
그 현실을 떠올리는 데는 반 병의 와인, 맥주 한 깡통, 소주 반 병이 필요하다.
지난 주말 사촌 조카의 결혼식날 나는 두 딸과 함께 하객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고 아내는 산악인으로 지리산 자락 산청에서 백두대간 출정식을 했었다.
어머니는 눈치가 구단이다.
모두가 축복해야 할 결혼식에 아내가 없었다는 사실에 불같이 화를 내며 내게 못난 놈이라 하셨다.
어머니는 당장이라도 아내에게 전화를 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이혼하는 꼴 보기 싫으면 전화하지 말라며 어머니에게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 그리고 그 후로 어머니에게 한 통의 전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아들, 아내의 남편이다.
오, 주여 내게 왜 이런 시련을 주었나요?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오.
이 꼬인 인연의 사슬은 내가 풀 재간이 없다.
나는 그냥 나일뿐.
어머니도 아내도 내 삶의 방관자가 아니었으니
나는 또 강술을 마셔야 하는가?
내리는 비에 묵은 감정도 서운한 아쉬움도 씻어 버리고 허허 웃으며 언제 그랬냐는 듯
툴툴 털고 예전처럼 알콩달콩
정이 넘치는 며느리와 시어머니로 다시
돌아오기를.
어느새 빗소리는 어둠 속에 묻혀
마알간 달빛이 금방이라도 고개를
내밀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 주기를.
그래도 비 그친 이 밤에 나는 잠들지 못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