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하고 한 달쯤 지나니 과대표 투표를 한다고 했다. 여학생들이 한표 밀어주겠다며 나가보라고 바람을 넣었다. 순진하다 못해 무지했던 나는 그 말을 믿고 과대표 선거에 나가 처첨하게 낙방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같은 과의 여학생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5월쯤이었나 보다.
초록이 더욱 짙어질 무렵 우리는 청량리 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성리라는 곳으로 MT를 갔다.
대성리란 곳이 최근에 박하사탕에 나오는 야유회의 배경장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쨌는 대성리는 물 맑고 공기 좋은 놀기 좋은 장소였다.
민박을 했는데 비닐하우스 안에 모여서 술도 마시고 춤도 추며 광란의 밤을 보냈다.
단지에 담은 막걸리를 밤새 퍼마시고 아침에는 퀭한 눈으로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집을 떠나 서울에 자리 잡은 나의 독립생활은 그야말로 좌충우돌을 넘어 흥청망청이었다.
20년 동안 걸려 있던 브레이크가 풀어진 느낌이었다.
일탈에 가까운 신입생 시절의 내 생활에 제동을 걸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착실하게 공부하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매달 꼬박꼬박 하숙비와 생활비를 계좌로 보내 주셨다. 어려운 살림에 그 돈이 얼마나 소중한 돈이라는 생각이 내게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어리고 무지했다.
하루의 일과는 매일 같은 루틴으로 계속되었다.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하숙집에서 제공하는 아침도 거르고 수업에 들어갔다. 과 동기들과 점심을 먹고 오후수업이 끝나면 하숙집 근처의 호프집으로 향했다. 브랜드 치킨도 아닌, 그저 기름에 튀긴 통닭 안주를 시켜 소주를 마셨다. 얼큰하게 취해 몸을 가누기 힘들어지면 하숙집으로 돌아가 쓰러져 쓰레기처럼 구겨져 잠을 잤다.
또 다음날이 되면 1교시 수업을 빼먹고 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호프집으로 향했다.
나는 그렇게 망가져 가고 있었다. 나의 일그러진 학교 생활을 야단칠 부모님은 내 곁에 없었다.
외상 술 값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하숙비를 내고 남은 생활비를 모두 외상술값으로 지불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