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시인 이호우에게 살구꽃은 고향의 상징이었다.
나는 고향을 생각하면 항상 미루나무가 떠오른다.
고향 가는 길가에 우뚝 솟은 미루나무들이 보이면 고향집이 머지않다는 신호였다.
미루나무가 차장 밖으로 보이면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그리운 고향,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시골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희열을 느꼈다.
내 고향은 의성군 안계면이다. 의성군 내에서는 제법 큰 면소재지이다. 안계는 평야지대가 넓어 쌀농사가 주를 이루는 곳으로 안계쌀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부모님이 부산에 정착하면서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고향을 떠났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기 전의 기억이 전혀 없다. 그렇지만 내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된 고향에 대한 추억 때문인지 자라면서 나는 자꾸 '고향 앞으로'를 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부모님의 도움 없이 고향을 혼자서 다녀온 건 국민학교 4학년 때였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면 그다음 날 어머니를 졸라 고향으로 떠났다.
지금에야 자가용으로 두 시간 반 정도면 도착하는 곳이지만 교통사정이 여의치 않은 70년대에는 반나절이나 걸렸다.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동대구역에 도착하여, 시내버스로 북부정류장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안계 방면 시외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언젠가 한 번은 안계 버스정류소에서 내려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농촌 풍경을 착각해서 한 정거장 앞인 비안 정류소에서 내려 한 시간이나 걸어서 안계로 간 적도 있었다.
안계에는 큰 어머니가 계셨다. 나는 방학 내내 그곳에서 먹고 자며 실컷 놀다가 개학이 임박해서야 부산으로 돌아가곤 했다.
안계에는 동갑내기 사촌과 사촌 형들도 둘이나 있었다.
주로 동갑의 사촌형제와 놀았지만 두 살 연상의 사촌 형에게는 좀 더 어른스러운 것들을 배웠다.
무더운 여름에는 물놀이를 했다.
안계를 가로지르는 위천이라는 낙동강 지류가 흐르고 있었다. 사촌들은 수영에 도가 텄지만 나는 부산에 살면서도 수영을 못했다.
언젠가 장마가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강에 물놀이를 갔었다. 수심이 내 키를 훨씬 넘어 두려운 마음이 있었지만 사촌들이 있어서 괜찮겠지 하는 심정으로 강물에 뛰어들었다.
사촌들은 또래들과 노는 데 정신이 빠져서 물에 빠진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빠른 물살에 휩쓸려 내려가면서 나는 이제 꼼짝없이 죽는구나 싶었다. 그때 허우적거리던 내 손에 수양버들 나뭇가지가 간신히 잡혔다. 그렇게 나는 살아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기억이다. 물론 그날의 일은 부모님께 절대 이야기하지 않았다.
겨울에는 주로 썰매 타기나 얼음지치기를 했다.
논에다 물을 대고 얼음이 얼면 그곳에서 썰매를 탔다.
우리는 그 썰매를 '시겟또'라 불렀다. 스케이트를 사투리로 발음해서 그렇게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그것을 시겟또라 불렀다. 시겟또는 직접 만들었는 데 나무판을 연결하고 중간에 철사를 덧대어 서서 타는 타입이 있었고 철사를 양쪽에 덧대어 앉아서 타는 타입이 있었다.
어느 날인가 얼음이 녹은 도랑에서 얼음을 지치다 얼음이 깨지면서 한쪽 발이 물에 빠졌다.
발도 시리고 운동화도 젖어서 짜증이 났다. 신발을 벗어서 불에 말렸는데 설상가상으로 운동화 끈이 불에 타버렸다.
그 해 겨울방학은 최악의 방학이었다.
시골에서는 자전거가 대세였다. 나는 아직 자전거를 배우기 전인데 동갑내기 사촌은 어른들이 타는 자전거를 자유자재로 타고 다녔다. 나를 뒤에 태우고 신작로를 달려 강으로 향했다. 강으로 가는 길에는 다리가 두 개 있었다.
두 번째 다리에 자전거가 올라서는 가 싶더니 비틀거리다 다리 아래로 추락했다. 나는 정신이 없었다. 다리 높이가 1미터쯤 되었던 거 같다. 사촌은 미안하다며 어쩔 줄 몰라했는데 나는 울면서 집까지 걸어서 왔다.
겨울밤에는 두 살 위의 사촌 형과 형 친구들을 따라 깜깜한 들판으로 나왔다.
볏짚을 쌓아놓은 남의 논에 들어가 짚단을 태우며 놀았다.
집에서 가져온 콩을 구워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때는 그게 잘못된 행동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시골에서는 다들 그렇게 논다고 내 마음대로 생각했다.
언젠가 사촌 형과 그 친구들이 토끼 잡으러 갈까 하고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나는 토끼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토끼는 산토끼가 아니었다.
그들은 학교 사육장에 있는 토끼를 훔쳐서 구워 먹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 후로 사촌 형 무리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지금은 모두 하얗게 머리가 센 초로의 아저씨가 되어 버린 사촌 형들은 이제 일 년에 한 번 보기도 힘들다.
나를 엄마처럼 챙겨 주시던 큰어머니도 작년 이맘때 우리 곁을 떠나셨다.
이제 나의 유년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고향에는 나와 놀아줄 그 누구도 없다. 나와 더불어 강가에서 노닐고 노을 물든 서쪽 하늘을 보며 미래를 이야기하던 동무들은 모두 떠나고 없다.
오직 어릴 적 흐르던 그 강물만이 오늘도 유유히 안계의 넓은 들을 스치 듯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