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저금통

by 석담

신학기가 시작된 교실에는 코흘리개 3학년 꼬맹이들이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동작을 따라 하느라 온통 정신은 선생님의 손 모양에 쏠려 있었다.

남향인 교실은 창을 비집고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에 잠이 올 지경이었지만 학생들의 소란스러움에 졸음은 감히 범접할 수 없었다.


다른 애들보다 한 살 많은 덕수는 어리숙한 얼굴로 오늘 새로 사귄 짝꿍 진수에게 학교 오는 길에 가져온 땅콩 캐러멜 두 개를 건넸다.

"덕수야, 니 이레 단거 자꾸 묵으면 이빨 다 썩는데이.

우리 아부지가 외국 갔다 올 때 과자 이따만큼 사 왔는데 엄마가 이 썩는다고 전부 갖다 버맀다 아이가"

진수는 캐러멜을 먹으면 절대 안 될 거라고 이야기하면서 이상하게도 덕수가 준 캐러멜을 까서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진수야, 너거 집 어딘데? 우리 집에 놀러 갈래?"

"진짜가? 우리 집은 저 새마을금고 옆 골목 안에 있다.

우리 진짜 큰 이층 집에 살았는데 아버지가 일하다 다치 갖고 작은 집으로 이사 온기다.""진짜가?"

진수는 그 이층 집이 그리운 듯 연신 눈을 꿈벅 거리며 아쉬워했다.

덕수도 '진짜가'라는 추임새를 진수가 말하는 중간에 여러 번 넣고는 부러운 눈길로 진수를 쳐다보았다.


해님이 하늘 높이 올라가 보이지 앉을 무렵 하교 종이 울렸다.

덕수는 진수와 다정하게 학교 교문을 나섰다.

맞벌이하시는 부모님 때문에 집에는 동생들 밖에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상 서랍에서 십 원짜리 동전 두 개를 꺼내어 여동생, 남동생에게 각각 십원씩 쥐어주고 동생들을 구멍가게로 내쫓았다.


진수는 많은 것을 덕수에게 알려 주었다.

원래 살던 이층 양옥집 이야기와 호랑이만큼 큰 개를 길렀던 이야기, 그리고 아버지가 외국에 가서 외국 자동차 장난감을 여러 개 사 왔던 이야기까지.

덕수는 진수의 집이, 아니 진수가 너무 부러웠다.

그리고 그 집에서 사는 애가 진수가 아닌 자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덕수와 진수는 숙제는 하지 않고 장난감을 갖고 놀다가 지루해지자 종이 접기를 했다.

지난 달력을 찢어서 개구리도 접고 학도 접었다.

덕수는 한번 접어본 기억이 있어서 다시 접어 보았지만 제대로 개구리나 학이 되지 않았다. 진수는 덕수가 접다가 실패한 종이를 받아 개구리도 학도 완벽하게 만들어 냈다.


덕수는 진수가 굉장히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집도 부자고 아버지가 돈도 많이 버시고 무엇하나 부러울 게 없는 집안이라 여겼다.

덕수는 찢어지게 가난한 자기 집이 싫었다. 엄마, 아버지는 항상 일하러 가고 크리스마스에 트리도 없고, 선물도 없는 집이 싫었다.


"덕수야, 내일 우리 집에 갈래?"

"진짜가? 그래 가자. 너거 집 보고 싶다."

덕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진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수의 집에 꼭 가겠다는 듯 다짐을 받았다.


뉘엿뉘엿 저녁해가 넘어갈 무렵, 모든 재미있는 놀이가 끝나고 덕수와 진수는 뭔가 새로운 재미있는 놀이가 없나 생각 중이었다.

덕수는 진수에게 무엇인가로 자랑하고 싶었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가 퍼뜩 떠올랐다.

"진수야, 내 돼지저금통 보이 주까?

내 돈 마이 모았데이"

덕수는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있던 돼지 저금통을 들고 나왔다. 순간 진수의 눈이 밝게 빛나는 듯했다.

"덕수야 니 저축 많이 했네. 우리 집에도 식구들마다 저금통 하나씩 다 있다. 니꺼 보다 훨씬 크다."

덕수는 진수가 자기보다 큰 저금통이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저금통을 다시 책상 속 깊숙한 곳에 던져 버렸다.


그때였다. 진수가 덕수에게 목이 마르다며 마실 것을 좀 갖다 달라고 했다. 덕수는 부엌에 가서 냉장고 문을 열어 보았다.

우유밖에 없었다.

"덕수야 우유 주까?"

아무 대답이 없다.

덕수는 우유를 컵에 따라 방으로 돌아왔다. 진수가 보이지 않았다. 이름을 여러 번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다.

덕수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돼지 저금통이 있던 자리에 손을 넣어 보았다. 저금통이 없었다. 덕수가 금쪽같이 아까는, 군것질 참아가며 모은 돼지저금통이 사라진 것이다.

덕수는 정신이 없었다. 아니 정신이 혼미 해진 것 같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언뜻 생각이 나지 않았다.


덕수는 집 밖으로 나와 골목을 달리고 있었다. 골목에서 아이들이 빠른 속도로 달리는 그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골목길이 끝나는 곳에는 끝없는 계단이 있었다. 그는 넘어질 듯 위태롭게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쯤 덕수는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잠시 쉬어야 했다. 그리고 다시 학교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진수네 집이 새마을금고 근처라 했으니 그쪽으로 가볼 생각이다. 진수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덕수가 학교 앞을 지나 조선소 입구에 왔을 때였다.

조선소 확성기에서 6시를 알리는 시보 방송이 나오고 애국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그는 순간 얼음이 되었다.

헐떡임을 억지로 진정하고 부동자세를 취한 후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얹었다.

국기 강하식이었다.

저녁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발이 쓰렸다. 덕수는 고개를 숙여 발아래를 보았다.

그는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 차림이었다. 물가를 지나왔는지 양말 앞부분이 물에 젖어 있었다.

그는 누가 맨발을 보기라도 할까 봐 부끄러워 꼼지락거렸다.

그의 왼쪽 손은 주먹을 쥔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산 너머로 채 넘어가지 못한 저녁해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커다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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