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미미했다.
"쓰레기 좀 버리고 와요."
저녁식사를 마치고 설거지 중인 아내가 돌아보며 그에게 한마디 던진다.
"나 잠옷 갈아입었는데..."
그는 주섬주섬 파자마를 끌어올리며 대꾸했다.
마치 잠옷은 자고 일어날 때까지 절대 벗을 수 없다는 듯 단호한 말투다.
오늘도 평화로운 하루로 끝내기 힘들겠다는 촉이 그에게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래도 아직은 기를 꺾일 그가 아니다.
엉덩이를 거실 바닥에 슬며시 주저앉힌다.
설거지하면서 발생하는 소음의 데시벨이 올라가기 시작하고 그 소란스러움에 아내의 중얼거림이 묻혀 들리지 않는다.
그는 눈길을 어디다 둘지,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이다.
작은방으로 들어가 하릴없이 컴퓨터 마우스만 빙빙 돌렸다.
마치 중요한 인터넷 검색이라도 하는 듯이.
결혼 3년 차인 이들 부부는 금쪽같은 첫 딸이 태어난 후부터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모든 싸움의 원인은 육아와 가사 분담에서 시작해 말싸움과 악다구니, 그리고 반목과 질시로 파국을 맞는다.
두 시간마다 수유를 해야 하는 신생아의 특성상 맞벌이 부부인 이들은 큰 난관에 봉착하고야 말았다.
부족한 수면과 수유 스트레스로 그의 아내는 폭발 직전이었다.
출산 초기부터 그들이 반목하고 대립한 것은 아니었다.
결혼 1년 만에 찾아온 득녀의 기쁨으로 밤잠도 설쳐가며 2시간마다 수유의 어려움도 감내하던 그였다.
누적된 수면 부족과 쉴 새 없이 울어대던 딸아이를 피해 작은방으로 도피한 그날 이후로 기나긴 전쟁은 발발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싸움은 국지전을 넘어 전면전으로 비화했다.
급기야 그는 더 이상의 분노를 감당할 길이 없어 외박을 감행했다. 대책 없는 외박 결정으로 다급히 회사 상사인 김 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SOS를 요청했다.
"과장님 오늘 하루만 재워 주세요"
"와? 부부 싸움했나?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다. 외박하고 하면 안 된다. 미안하다 하고 그냥 들어가라."
그 당시 김 과장은 아군이 되기를 꺼려했다.
'하루 유숙할 공간이 없다니...'
집을 나서며 기세 등등하던 그는 한풀 꺾였다. 설상가상으로 급히 집을 나오느라 주머니에 현금도 없는 상태였다.
다시 김 과장에게 전화해 여관비를 빌리기에는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회사 근처로 차를 몰았다. 10시가 넘은 시간이라 공단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후미진 공간에 주차를 하고 히터를 켰다. 5월에 접어든 지 한참 지났는데도 밤공기는 차가웠다.
불편한 카시트에 기대어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이 밝았다. 몸 전체가 두드려 맞은 듯 뻐근했다.
그는 부스스한 얼굴을 대충 정리하고 시계를 보았다.
일곱 시가 넘었다. 거리에는 출근하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그도 그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기세 등등하던 외박은 하루천하로 끝났다.
이튿날 저녁 패잔병의 몰골로 집에 슬그머니 기어 들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내는 그에게 외박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었다.
저녁상을 차려 전장에서 돌아온 그를 위로했다.
그날 저녁은 잠시 휴전을 한 듯이 보였다.
이튿날의 세계 대전을 예고하는 듯 적막만 가득했다.
이튿날은 주말이었다.
깊은 단잠에 빠진 그를 깨운 건 금쪽이의 찢어질 듯 울 어제치는 소리였다.
"여보, 애 우는데 뭐하누?"
몇 번을 간절히 아내를 불렀지만 어디에도 아내는 없다.
문득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이 여자가 애를 두고 집을 나간 기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아니, 눈앞이 캄캄했다.
전화기를 찾아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중입니다"
몇 번을 반복해서 돌려 보지만 여전히 통화 중이다.
이제 그의 분노는 자포자기로 서서히 바뀌어 갔다.
30분이 흘렀지만 여전히 집안은 적막에 싸여 있고 그는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문쪽만 바라보고 있다.
금쪽이는 이 난국을 아는지 모르는지 젖병을 물고 식사에 여념이 없다.
"그래, 한번 해보자는 거지.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내 혼자 애 못 키울까 봐서..."
그는 결의에 찬 발걸음으로 현관문으로 걸어가서 이중 잠금장치를 굳게 잠갔다.
더 이상의 타협은 없을 거라고 혼자 굳게 다짐했다.
아내가 가출한 지 50분쯤 지나서였다.
문을 당기는 소리가 나는 듯싶더니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누구세요?"
"내지, 누구겠노? 문은 와 잠갔노?
쓰레기 버리고 언니하고 통화 좀 하고 왔는데 문은 왜 잠그고 난린데?"
아내였다. 아내가 가출에서 돌아온 것이다.
그는 뭐라고 궁색한 변명이라도 해야겠는데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신은 무슨 전화를 그래 오래 하는데..."
그는 그렇게 한마디 툭 던지고는 싱크대로 다가가 고무장갑을 찾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