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의 추억

by 석담

그가 37년 전의 그 기억을 떠올리게 된 것은 퇴근길에 앞산 순환로를 이용하게 된 것이 그 발단이 되었고, 앞산 고가차도의 차량 정체로 인해 우회로인 앞산 공원로로 진입하면서 가로수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대구의 야경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파노라마처럼 떠오른 눈 내리던 날의 기억 때문이었다.


그날은 대입학력고사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2월 말이었다. 세모를 앞두고 주말을 앞둔 거리에는 주말을 즐기려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잘 왔다. 오래 기다렸나?"

"아니, 방금 왔다."


J는 그와 동갑으로 대구의 Y대 1학년에 재학 중이었지만 부산에 사는 그는 호적이 늦게 올라 아직 고등학교 3학년으로 며칠 전에 학력고사를 끝내고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둘은 사촌 지간으로 사는 곳은 달랐지만 죽이 잘 맞아서 자주 의기투합하여 만나곤 했다.


둘은 가까운 가락국수 가게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오자 식당에는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가락국수와 만두, 그리고 김밥을 시켜서 점심을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의 하이톤 목소리가 식당에 울려 퍼졌다.


"와, 눈 온다!"


그와 J는 동시에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밖에는 하얀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동시에 탄성을 지르며 눈 내리는 거리를 응시했다.

부산에서 20년 가까이 살아온 그에게 눈 내리는 풍경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가 입시를 끝내고 대구행을 마음먹은 건 J의 제안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금껏 모태솔로인 그에게 J는 대구 여학생을 소개해 주겠다는 그가 혹 할만한 제안을 했다. 국민학교 졸업 후로 여자라고는 엄마하고 여동생 말고는 대화할 기회조차 없었던 그에게 여자 친구는 감히 넘볼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베일에 싸인 신비의 여학생을 오늘 만난다는 생각에 벌써 그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게다가 눈까지 내려 오늘의 분위기를 최고조로 만들어 주고 있었으니 금상첨화였다.

그는 지금 오는 눈은 분명 서설(瑞雪) 일거라고 혼자 마음대로 생각했다.


식사를 마치고 동성로로 나온 그들은 목적지도 없이 그냥 걷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함박눈을 온몸으로 맞으며 정처 없이 걷다가 J는 혼잣말처럼 한마디 내뱉었다.


"여자 꼬시러 갈래?"

"오늘 소개해주는 거 아니었나?"


그제야 그는 J의 흰소리에 속았다는 걸 알았다.

J는 그냥 그가 보고 싶어서 한번 해본 소리라고 둘러댔다. 좀 황당하긴 했지만 그는 보고 싶어서 그랬다니 그냥 용서하기로 했다.

그들은 방향을 바꿔 여자 꼬시기에 몰두했다.

그 당시 부산에서는 여자를 꼬시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짓을 "까대기"라고 불렀다. 그 어원을 알 수는 없지만 학교에서는 '까대기 치러 간다'는 학생들의 이야기들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그와 J는 완전히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까대기를 시작했다.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허탕의 연속이었다. 그는 얼굴이 붉어져서 그만두고 싶었다.

그에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다짐을 받고 단발머리의 두 여학생에게 다가간 J는 잠시 후 음흉한 미소를 띠며 돌아왔다.


그녀들은 대구의 K여고 삼 학년이라고 했다.

그녀들은 한참 떠들고 웃으면서 두 촌놈의 혼을 쏙 빼놓았다.

미성당이라는 빵집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여학생들의 환심을 사고자 노력했다.

밖에는 여전히 눈이 내려 조금씩 쌓이고 있었다.

약간 어둑해져 갈 무렵 여학생 중 한 명이 귀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앞산 공원에 눈 보러 가고 싶다"


그들은 누가 먼 저랄 거도 없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고 앞산 행 버스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앞산 근처에서 버스를 내린 그들은 눈 쌓인 언덕길을 따라 앞산 공원을 올랐다.

이미 어두워진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었고 눈도 조금씩 줄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앞산 공원에서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도시의 야경이 눈에 들어 올 무렵 그들은 공원을 빠져나왔다. 여학생들은 그만 가봐야 할거 같다고 이야기했다.

J와 그는 작별의 시간이 너무 빨리 찾아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J는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졸라 댔으나 연락처는 끝끝내 받지 못했다.

대신에 그녀들은 내년 크리스마스날 저녁에 앞산 공원에서 만나자는 제안을 했다.

그들도 그러자고 화답했고 만나는 시간을 정하고 났을 때 버스가 도착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눈은 더 이상 내리지 않았고 하늘엔 별이 초롱초롱했다.

휘황 찬란한 야경을 보며 그들은 도시로 돌이 왔다.


이듬해 봄, 그는 대학에 진학하는 바람에 서울로 갔고 J는 독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들 모두 크리스마스 때 만나기로 했던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녀들이 그 해 크리스마스 때 앞산 공원에 왔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앞산 순환로를 다 돌아서 내려올 무렵, 그는 눈 내리던 날 만난 그녀들의 미소가 생각나서 자꾸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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