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와 자아 사이, 나는 어디쯤일까
육아와 자아는 어떤 사이일까. 두 마리 토끼일까? 한 마리 토끼의 두 얼굴일까? 내가 잡아야 하는 건 무엇일까.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부터 끊임없이 그 사이에서 고민해 왔다.
엄마는 언제부터 엄마가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임신을 확인한 순간부터, 심장 소리를 처음 들은 날부터, 아이의 태동을 처음 느낀 날부터 나는 엄마가 되었을까? 법적으로는 2020년 2월 21일, 나는 엄마가 되었다. 세상에서 아이를 마주하기 전까지, 엄마가 되면 자연스럽게 모성애도 장착되어 나오는 줄 알았다. 그렇게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가 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아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럽기만 할 줄 알았다.
엄마가 되는 것은 그 시작부터 쉽지 않다는 사실은 임신 준비 과정부터 깨닫기 시작했다. 임신 후에도 입덧, 임신성 당뇨 등을 겪으면서 아이의 존재를 강력하게 느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지도 못했다. 먹는 즐거움이 큰 나에게 입덧 시기는 괴로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입덧이 심해서 먹고 싶던 메뉴를 먹고 나서 식당을 나서기도 전에 구토를 해야 했던 날에는 속상하고 서러워서 엉엉 울기도 했다. 출산 후에도 짧았던 모유 수유였지만, 모유 수유도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임신도 출산도 그 후 시작된 육아도 생각했던 것과 너무나도 달랐다.
모든 게 처음인 초보 중 초보였기에 모든 순간마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어려웠다. 육아서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보느라 부족한 잠과 에너지를 더욱 부족하게 만들었다. 아이를 위한 마음으로 했던 행동이었지만, 돌아보면 나를 위한 것도, 아이를 위한 것도,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육아를 너무 모르고 있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 근자감만 가득했다. 아이들이 다 크고 나면 자기 혼자 알아서 큰 줄 안다고 한다는 말처럼 나는 엄마가 애써서 나를 키워준 그 시간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이가 한 단계씩 자랄 때마다 새로운 도전 과제가 생겼다. 뒤집기, 되집기, 앉기, 서기, 걷기, 이유식, 유아식, 말하기 등 아이는 차근차근 성장했고, 나는 점차 엄마가 되어 갔다. 아니, ‘엄마’로만 되는 기분이 들었다. ‘나’로 살던 나의 ‘자아(自我)’는 사라지고, ‘엄마’로 사는 ‘육아(育兒)’만 남았다. 다시 떠올려본다. ‘육아’와 ‘자아’는 두 마리 토끼일까 한 마리 토끼일까. 흔히 ‘육아(育兒)’를 ‘육아(育我)’라고도 한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인 나도 그저 ‘나’의 여러 가지 모습 중 하나일 뿐, 엄마가 된다고 해서 ‘자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도 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아이가 크느라 성장통을 앓듯이, 엄마도 엄마로 크느라, 엄마로도 나로도 살려고 고군분투하느라 성장통을 앓는 사람이 많다. 2020년부터 2025년까지. 엄마로서 5년 차이지만, 여전히 엄마로도 나로도 사는 게 어렵고, 어려워서 아프고 힘들다. 수시로 무기력해지고, 때때로 무너졌다. 솔직히 말하면, 육아와 자아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은 듯 보이거나 두 가지 모두 잘 잡은 듯한 사람을 볼 때마다 그렇지 못한 내가 싫어졌다. 동시에 자괴감이 들거나 좌절감이 밀려왔다. 상대적으로 나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듯 보이고, 나로도 엄마로도 부족한 점만 눈에 들어왔다.
육아와 자아 중 지금 내가 잡아야 하는 건 무엇일까. 반드시 두 가지 중 하나만 골라야 할까. 두 가지 모두 잡고 싶은 것은 나의 욕심일까.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다는 말이 나를 버티게 할 때가 있다. 엄마로도 나로도 그저 내 자리에 있는 것. 잘 있지 않아도, 잘 해내지 않아도, 그저 하고 있다는 것.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한다.
육아와 자아 중 내가 잡아야 하는 건
‘지금 여기’라고 생각한다.
육아하는 순간에는 ‘아이’와 ‘나’, ‘우리’에게 집중하고, 육아하지 않는 순간에는 ‘나’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것. 지금은 비록 그 시간의 차이가 아주 크지만, 이 또한 점점 비슷해지거나 ‘육아’ 하지 않는 시간이 더 길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오히려 ‘육아’하는 순간이 ‘자아’로 있는 순간보다 더욱 그리워진다는 육아 선배들의 말도 생각난다.
지지난주와 지난주 연재를 하지 못했다. 연재를 시작할 때는, 주 1회 하나의 글을 써서 올리는 일은 거뜬히 해낼 줄 알았다. 그런데 2주 연달아 글을 전혀 쓰지 못했다. 짧은 메모들을 끄적거리긴 했지만, 끝내 글 하나는 완성하지 못했다. 약 2주 동안 아이와 여행 가기 전, 열흘간의 여행, 여행 후까지 시간과 에너지를 아이를 위해 썼다. 아이를 재우다가 잠들고, 먼저 일어나서 하루를 준비하다 보면 아이가 깨는 날이 이어졌다. 책 읽기, 글쓰기, 일본어 공부 등 나를 위해 쓰던 시간은 하루 중 아주 잠깐이거나 모두 내려놓아야 했다.
잠을 줄여서라도 그 시간을 확보하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수면이나 휴식을 선택했다. 다음날 ‘자아’와 ‘육아’ 모두 힘들어진다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를 잡는 것이 결국 육아와 자아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자아’를 위해 내려놓은 것에 대한 아쉬움도 컸지만, 덕분에 ‘우리’가 얻은 것들은 더욱 컸다.
나는 ‘육아’도 하고 ‘자아’도 가진 두 마리 토끼 그 자체이다. 육아도 자아도 욕심내도 괜찮다. 완벽하거나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 어차피 그럴 수도 없다. 육아하는 엄마도 나이고, 자아를 챙기는 나도 엄마이다. 그 모든 순간이 ‘나’이자 ‘엄마’이기에, 어떤 순간에도 괜찮다는 마음만 챙기려고 한다.
이제는 ‘아이’만 보는 것도, ‘나’만 보는 것도 아니라, ‘우리’를 볼 수 있다.
누군가는 자아와 육아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정신 승리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안다.
‘지금 여기’ 모든 순간을 지켰다는 것만으로도 오늘도 진정한 ‘승리’를 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