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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사과 Jul 13. 2024

감히 정신 좀 차리라니

8

작은 사사로운 감정들은, 특히 부정적인 감정들은 그때그때 털어내고 정리해두지 않으면 악취가 가득한 쓰레기통이 되어 결국 사달을 낸다. 정확히 기억나는 임신 5개월 차, 그때 즈음이면 태아가 엄마의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성장한다. 나의 불안한 호르몬과 감정의 변화들을 첫째 아이 임신했을 때 이미 겪어봤기 때문에, 둘째 임신을 하고 나서 남편에게 누누이 사전경고처럼 말해두었다. 제발 임신 기간에는 내 성질을 건들지 말아 달라고.


평소 성격은 사교성도 좋고 외향적이고 밝은 편에 속해 나 스스로 좋은 편이라고 자부하지만, 성질은 다른 문제였다. 심각한 문제가 생기거나 심기가 크게 불편해지는 일이 생기면 성질이 아주 무서워지고 더러워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기질적인 건지, 환경적인 건지, 아니면 어릴 적부터 쌓여온 트라우마 때문에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방어기제인지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이런 부분에 대한 자기 조절력이 부족한 나를 잘 알았을까, 덕분에 일찍이부터 수련을 접하고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첫째 출산을 하고 나서 그야말로 육아 외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선택적으로 하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육아에만 전념하고 싶었고 실제로 그랬다. 언제나 나의 관심 안테나들이 여러 분야에 촉을 기울이고 있는 다능인 기질을 다분히 가진 나를 잘 알았다. 그래서 육아에 몰입해야만 아이가 잘 클 수 있다고 굳게 믿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꼬박 2년을 살았다. 그랬더니 내 안에 부아가 치밀어 오름과 동시에 한동안 일부러 꺼두었던 안테나들이 저절로 켜져 버렸다. 그러더니 어느샌가 신호를 마구 보내기 시작했다.


눈에 들어온 모집공고, "성우 아카데미". 20대 초반시절에 꿈꾸기도 했던 성우란 직업,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여러 경험들을 쌓으며 내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을 좁히고 살아가던 나에게 또 다른 도전에 대한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성우. 출산 이후의 삶을 다분히 겪어봤으니, 출산 전에 뭐라도 하나 배워서 해놓고 싶은 욕구가 간절해졌다. '출산하고 나면 절대 이런 기회가 없을 거야,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주 5일 내내 꼬박 3시간씩 한 달 동안 성우 아카데미 교육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출산 이후 아이 없이 혼자서 어딘가에 가 본적이 거의 없는데, 무려 3시간이라니. 말이 3시간이지 왔다 갔다 이동 생각하면 적어도 4시간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도 겨우 낼까 말까 한 시간인데, 매일이라니. 내가 아이를 떼어놓고 혼자 가서 무언가 배우고 트레이닝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되는 상황이 맞는 걸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출퇴근 시간이 매일같이 달라지고 불규칙한 남편의 한 달간 스케줄을 가만히 바라봤다.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부탁할 수 있는 날과 도저히 안 돼서 내가 아이를 데리고 아카데미에 가야 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들이 눈앞에 그려졌다. 일단 그건 합격하면 생각해 보고 일단 오디션 준비나 하자. 대본에 따른 여러 대사들을 열심히 연습하고 녹음해서 보냈다. 고요한 상황이 있을 리가 없는 나의 녹음파일엔 울거나 쫑알쫑알 거리는 아기 목소리가 함께 녹음되어 전송됐다.



'합격', 선발되어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는 기쁨도 잠시였다. 남편에게 뭐라고 얘기를 해서 설득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출근한 남편에게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냈다.

"여보, 저 성우아카데미 공고 올라와서 혹시 몰라서 오디션 보고 지원했는데 합격했어요. 일정이 이렇게 저렇게 되는데 딱 한 달여요. 한 달만 저 다녀도 돼요? 아이는 여보가 쉴 땐 좀 봐주고, 출근할 땐 제가 데려가던지 어떻게 방법을 찾아볼게요."

"... 일 좀 그만 벌리세요, 하지 마세요. 현실적으로 성우 안 돼요."


너무도 단호한 거절의 메시지에 당황한 나머지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곧바로 이유식 먹이고 안아서 트림시키고 있던 아이를 내려놓고 책 하나를 펼쳐 던져주고는 휴대폰을 붙잡아 손가락을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일을 그만 벌리라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데 무슨 자격으로 하지 말라니요??"

"여태 나를 만나고부터 무언가 끝까지 제대로 한 일이 없잖아요. 뭐를 시작했으면 돈을 벌던지 완전히 직업으로 인정받던지 해야 되는데, 여보는 계속 일만 벌이고 시작만 하지 결과가 없으니까 하는 소리예요.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10년 넘게 한 직장에서 근무하고 외길 인생을 살아온 남편의 시선에서도, 보통의 일반적인 사회 시선에서도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저렇게 쉽게 치부될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고군분투해 온 환경과 그간의 애씀을 단 1% 인정해주지 않는, 그야말로 자존심을 처절하게 부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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