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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사과 Jul 11. 2024

섬에 사니까 더 위험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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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도를 알게 된 건 2014년에 "휴식", "힐링", "치유", "해독", "디톡스"란 단어들이 들어간 당시 유행하고 있었고, 한겨레 신문사에서 국선도와 함께 제휴를 맺어 운영하던 휴캠프에 참여하면서였다. 10대부터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여러 병원을 돌며 여러 수술을 반복하고도 결국 긴 시간 누워있으며 깨달은 건, 결국 몸을 고치고 병을 고친다는 건 사실 인간인 의사가 영역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의사가 여러 가지 시도로 당장 눈에 보이는 문제 해결을 위해 수술을 해주거나 증상을 완화시키기 위한 약을 처방해 줄 수는 있으나, 유기적 생명체인 인간에 대한 완전한 치료 또는 치유를 의사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 자체가 오류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간 내가 살아온 삶에서 지혜롭지 않았고 올바르지 않았던 선택들이 쌓여 결국 마음의 병을 만들고 몸의 병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이제는 누구에게 나의 몸을 맡길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의 자연치유적 힘을 믿어보자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내 통장에 남아있던 전 재산의 돈, 약 70만 원가량을 탈탈 털어 나처럼 쉼이 절실히 필요했던 엄마를 모시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선사해 준다는 캠프를 겨울을 앞둔 느지막한 가을의 끝자락에 3박 4일 공주로 다녀왔다. 당시 나는 이미 10대에 일찍이 만났던 요가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었던 때였다. 요가를 통해 배운 명상과 호흡법은 모호함으로 어렵게 느껴졌지만, 그저 배운 대로 관성적으로 해오고 있었다. 요가에서는 풀무호흡, 정뇌호흡, 교호호흡 등등 뭔가 하면서도 이렇게 해야 되는 게 맞나 싶은 인위적인 과한 호흡들도 있었는데, 여기선 그저 평온하고 자연스러운 것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 같았다. 특히 명상과 호흡에 있어서 해독단식캠프를 운영하시던 국선도 강사님들을 통해 개념이나 원리에 대한 이해가 아주 단순하고 명쾌 해졌다.



심지어 '기혈순환유통법'이라고 불리는 아주 단순한 체조를 누워서 대충 살살 따라만 했는데도, 정말 신기하게도 내 손 끝부터 발 끝까지 혈액순환을 도와주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벌어지지 않는 다리를 벌리고, 꺾이지 않는 허리를 꺾어가며 도대체 왜 나는 이게 안되냐는 마음의 고행과 번뇌를 참아가며 애써 동작을 완성 해야만 할 것 같았던 요가. 그렇게 애쓰던 요가와 달리 캠프가 진행되는 동안 대부분의 프로그램을 그저 누워서 설렁설렁할 수밖에 없던 나에게 며칠간의 경험은 나의 뇌에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특히 프로그램을 운영하시던 중년의 강사진 분들의 반짝반짝 빛이 나는 얼굴과 평온함에 매료되었다. ‘도대체 저 어르신들은 어떻게 저렇게 얼굴에서 광이 나는 걸까?’


당시의 나는 기력을 완전히 소진해서 눈에 힘을 잃었었다. 눈을 가만히 뜨고 있을 수가 없어서 계속해서 눈을 껌뻑껌뻑 거려야만 했을 정도였다. 사람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기 조차도 어려웠다. 결국 국선도가 도대체 무엇이냐를 혼자 찾아보고 알아보다, 상담 요청을 드려 결국 ‘국선도대학’ 이란 곳에 아예 입소하게 되었다. (국선도 대학은 일반적인 지역수련장에서 하루 1회 하는 수련 과정을 새벽수련, 오전수련, 생활수련, 오후수련으로 식사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단전호흡과 명상, 무예 등으로 수련을 하며 정해진 커리큘럼 안에서 숙식을 함께하며 단체 생활을 하게 된다. 밀도 있게 집중적으로 2년간 수련을 진행하고 정규 자격과정을 거쳐 태권도에서 승단하는 과정처럼 흰띠로 시작해 노란띠, 빨간 띠, 파란 띠, 빨간 파란 띠, 검은띠 등으로 차츰 올라가 추후 사범이 될 자격을 취득할 수 있게 된다. 현재는 코로나 이후 운영을 임시중단한 상태다.)



나는 허리를 포함한 건강 회복을 위해 수련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에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국선도가 과거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 회사의 복지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는 것. 오전 6시엔가 부장님 급 어르신 남자분들이 푸르끼리한 태권도 도복 같은 것을 입고 요가와 비슷하게 하시던 것. 쿵후, 태극권, 기수련 같은 거로 뭉퉁그려 생각하던 것,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나 하시는 것 같던 촌스럽게 생각하던 그 무엇이란 걸 알게 됐다. 9년간 입던 몸의 라인이 드러나고 맵시 있게 보이는, 건강미 넘치는 그럴듯한 현대 젊은 여성의 이미지를 그려주는 요가복 대신 펑퍼짐하고 새파랗고 큼지막한 도복을 입고 한국의 전통 수련법을 하나씩 배워가며 공부하는 나라니.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산중수행은 평생을 두고 가장 잘했던 선택적 쉼이자 내 삶을 철학과 가치관을 통째로 바꾼 아주 큰 배움의 경험이었다.

2년간 산속에 들어가서 수련생활을 하겠노라 호기롭게 친한 친구에게 얘기했을 때, 그 친구가 그랬다.

"야, 그거 이상한 사이비 종교 같은 거 아니야? 너 걱정돼, 왜 그렇게까지 해?"

"아니야, 그냥 대중적이지 않고 상업적인 곳이 아니라서 다들 잘 모를 뿐이지, 그런 거 아니야."

"진짜? 너 막 세뇌되고 그런 거 아니지?"

"응, 아니야. 진짜로"

내가 당시 다니던 직장이 워낙 공신력이 있는 막강한 기관이었고, 그런 기관에서 오랫동안 진행해 온 걸 보았기 때문에 '도'라는 글자가 붙었다고 해서 흔히 생각하는 사이비나 이상한 단체가 아니란 걸 빨리 알고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나에겐 큰 행운이었다.



자연 속에서 단순화된 생활과 수련, 더불어 건강한 음식을 통해 건강을 많이 회복했던 나는 2015년에 전국무예대회에 참석했다가 생긴 부상으로 연골판이 다시 또 손상되었다. 워낙 70-80대 노인의 몸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걸을 수 없을 만큼의 상태가 되어 수련생활을 중단하고, 결국 또다시 무릎 수술을 받았다. 광진구의 대학병원에서도 한강을 건너 약 9km 정도 떨어진, 강동구에 있는 작은 병원에서 복귀를 위해 기나긴 재활생활을 반복해야 했다. 그 작은 병원에서 우연히 만났던 환자동기는 제주에서 근무하던 남자였는데, 동병상련의 그 남자가 지금의 내 남편이 되었다.



그렇게 20대 청춘에 일찍이 수련생활을 하고도, 그렇게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면서도, 평생 수련하는 삶을 살겠다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내 삶은 결국 수련과는 별개로 따로 떨어져 있던 걸까. 입덧의 고통은 괜한 섬을 탓하게 만들었다. 돌아보면 온통 출렁이는 푸른 바다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내 입덧은 바다의 너울과 같이 더욱 심해지는 것만 같았다. 분명 바다가 좋았는데, 바다가 싫어졌다. 분명 에메랄드 빛 바다의 윤슬이 반짝임에 눈이 부시고 황홀했는데, 푸르른 바다가 차갑게 느껴지고 그 깊이를 알 수 없어 암흑처럼 까맣게 보여 무서워졌다. 바다를 보면 뛰어들고 싶었다. 바닷속으로 잠식이 되면 입덧도 사라지고 평온해질 것 같았다. 파도가 까만 돌에 부딪쳐 하얗게 거품이 되어 부서지는 것처럼 차라리 내 몸과 마음, 영혼도 부서지면 좋을 것 같았다. 입덧과 출혈로 침대에 꼼짝 못 하고 누워있는 동안 그저 바다에 뛰어들어 죽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살고 싶었다. 그래서 산으로, 숲으로, 육지로, 수련하며 지내던 마음 평온했던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싫고 멀어지고 싶던 가족이 그리워지고, 한 때 내 인생이 불행하게 된 건 다 부모탓이라며 증오와 원망의 대상이기도 했던 '엄마'와 '아빠'의 품에 안기고도 싶었다. 각자 사느라 바빠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싶은 몇 되지 않는 친구들과의 수다가 절실했다. 금세 툭 하고 손으로 끊어질법한 얇고 짧은 뿌리를 겨우 물아래 내려두고 둥둥 떠다니며 사는 부레옥잠 같은 것이 아닌, 땅 속에 아주 깊이 내린 대나무의 묵직한 뿌리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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