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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사과 Jul 10. 2024

나를 용서해 줘

6

깊고도 차가운 암흑 같은 바닷속에서 뱃속에 둘째 아이를 품고 그저 해저를 향해 하염없이 가라앉는 긴 시간을 보내던 나. 그랬다, 그랬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다 내려놓고 싶었다. 이미 첫째 아이를 오롯이 온 에너지를 다해 양육하느라 사지가 너덜너덜 거리는 통증과 고통으로 심신이 지쳐있었다. 특히 신체적으로 너무 버겁고 힘들었고 틈만 나면 온몸의 관절과 뼈마디가 쑤시고 아팠다. 손목, 손가락, 팔, 어깨, 목, 허리, 무릎,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아이가 잠들고 나면 밤마다 끙끙거리며 잠들기 일쑤였다. 신체 건강한 사람도 힘들다 하는 게 육아인데, 2리터짜리 삼다수 한 병도 제대로 들지 못할 만큼 약해져 있던 내가 삼다수 다섯 병에 달하는 무게의 아이를 한 손으로 안아 들고 온 집안일을 하고 있으려니 몸이 성할 수가 없었다.



사실 몸이 아픈 것에도 오랜 기간 동안 만성화가 되어 그냥 내 평생의 숙제라고 여기며 살고 있었다. 한때는 '왜 나만 이렇게 아파야 할까'에 대한 질문을 했고, 답을 찾아 헤맨 적이 있다. 이 질문은 이미 20대에 병원에서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들 속에서 반복해서 누워 살던 시절에 끝나있었다. 이번생은 그냥 이렇게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게 내 숙명이려니 받아들였기 때문에 임신과 출산도 하기로 했던 거니까.

"오빠, 우리가 결혼을 해서 살다가 아이를 갖게 되면 나는 낳는 거에만 최선을 다할게. 키우는 건 오빠가 키워. 알았지?"

"왜?"

"임신하면 살이 찌잖아. 1kg 살이 찔 때마다 내 무릎에는 5배 하중이 가해져서 무리가 더 된대. 보통 임신하면 못해도 10kg 정도 살이 찐다잖아. 그럼 적어도 50배 이상 무릎에 무리가 간다는 소리고. 나는 이 몸으로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만으로도 내 할 일은 다 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이 몸으로 나는 아이를 결코 키울 수 없을 거야. 그러니까 오빠가 키워야 돼. 그럼 어떻게든 내가 낳는 건 해볼게."



나는 부모로부터 따뜻한 사랑과 관심 같은 사치스러운 무언가를 받거나, 보거나, 배워본 적 없었다고. 온통 뾰족하고 거칠고 울퉁불퉁해 볼품없는 돌이 억지로 굴러가듯 자랐다고 생각했다. 그저 '내 엄마와는 절대 똑같지 않은 엄마, 내 엄마와는 다른 엄마, 내가 부러워했던 친구들의 엄마', 소위 '좋은 엄마'가 되어야겠다는 사명아래 정신력으로 버티며 지냈다. 그렇게 나를 철저하게 지우고, 오로지 아이를 위해서 희생하고 의욕이 넘치는 열정적인 육아 일상을 반복적으로 살아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남편과의 관계는 엉망이 되었다.


 문제가 생기거나 힘들면 다 남편 탓인 것만 같았다. 남편이 세심하지 못해서, 남편이 꼼꼼하지 못해서, 남편이 다정하지 못해서, 남편이 빠르지 못해서, 남편이 귀찮아해서, 남편이 당연하게 여겨서, 남편이 인정해주지 않아서, 남편이 말이 없어서, 남편이 경험이 너무 부족해서, 남편이 나랑 너무 다른 사람이라서, 남편도 나처럼 받고 자란 게 없어서 등등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이유들을 다 갖다 붙여 언제나 남편 탓을 했다. 아이 하나로도 이미 힘들고 벅찬데 뱃속에 도대체 아이는 왜 또 가지게 된 걸까. 내가 무슨 자격으로 또다시 아이를 잉태한단 말인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나는 언제나 짜증이 가득한 말투로 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곤 어느 날엔 아주 날이 선 목소리로 남편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결코 해서는 안될 말을.

"왜 둘째를 임신시켜서 이렇게 나를 고생시키는 건데, 왜!! 왜 나만 힘들어야 하는 건데, 도대체 왜!!!!!"



출산하자마자 바로 어린이집 대기 등록을 해놨었다. 꼬박 2년을 대기해서 겨우 연락이 온 공립어린이집 입소는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으로 취소를 시켰던 걸까. 왜 나는 또 이렇게 사서 고생하는 길을 선택했을까. 무슨 자신감으로 세 돌까지는 무조건 아이를 데리고 있겠다고, 둘째 임신을 하고서도 그럴 수 있다고 호언장담 했을까. 왜 나는 육아가 나한테 적성에 잘 맞는다고, 육아하는 게 행복하다고, 아이와 있는 시간이 너무 기쁘다며 아이를 절대 기관에 보내지 않겠노라고 착각했을까.


두 돌도 되지 않아 아직은 손 많이 필요한 아기와 24시간 내내 붙어있어야 하는 시간은 더 이상 임신 전의 보람과 기쁨이 아니었다. 입덧으로 내 몸 간수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그저 어쩔 수 없이 이행해야 하는 책임감과 번뇌의 연속이었다. 진심이 아닌 거짓으로 가면을 썼다. 아이 앞에서 억지로 괜찮은 척했다. 그렇게 아이를 대하는 나 스스로가 너무도 가식적이었다. 가식적으로라도 움직여지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을 때엔 아이가 내 눈에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남편이라도 있는 날엔 뭍으로 나와 숨이 좀 쉬어지는가 했다. 그러나 남편 없이 꼬박 혼자서 육아를 도맡아 해야 하는 날이 많았다. 깊은 바닷속에서 가까스로 참았던 숨이 다 되어 금방이라도 바닷물이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시체처럼 무기력하게 멍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날이 잦았다. 그런 내 옆에 다가와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은 언제나 나를 크나큰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들었고, 내 눈에는 금세 눈물이 고이길 반복했다. 뱃속에서 나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느끼고 있을 또 다른 아이의 눈빛 또한 나를 끊임없이 질타하는 듯했다.



어느 날은 호르몬이 미칠 듯이 오르락내리락 왔다 갔다 했던 걸까, 그냥 정신이 왔다 갔다 한 걸까. 첫째 아이가 잠들자마자 조명 꺼진 캄캄한 거실에 쏜살처럼 튀어나가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내가 누구인지 모를 만큼 뱃속에 음식물을 가득 쑤셔 넣었다. 군고구마를 무려 다섯 개나 까먹고, 우유를 한 컵 벌컥벌컥 다 마시고, 아이가 남긴 우유를 또 쏟아붓듯 마시고, 냉동실에 오래 놔둬서 하얗게 성에가 낀 오메기떡을 두 개 전자레인지에 돌려 집어삼켰다. 먹다 남긴 지 한참 된 초콜릿 조각을 부수어 먹어치우고, 김치냉장고에서 꺼낸 귤을 네 개나 까먹고, 천혜향을 하나 또 까먹고, 하다못해 유통기한이 지나 창고에서 굴러다니던 비빔면을 부셔먹었다. 속이 아플 만큼 먹고 또 먹었더니 등에 식은땀이 났고 위가 아파 몹시 고통스러웠다. 이내 화장실로 달려가 한 손으로는 변기를 붙잡고 손가락을 넣어서 다시 토해냈다. 내가 일부러 손을 넣어 억지로 토를 해본 건 내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쓰라린 위장과 구역질로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나는 변기에 앉아 오열을 해가며, 내 배를 주먹으로 때렸다. 그리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내 안에 퍼부었다.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내가 너무 힘들어 죽겠다고!!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는 거야...'

'아예 그냥 죽어버려, 죽었으면 좋겠어. 왜 나 같은 걸 찾아와서 이렇게 나를 고통스럽게 하냐고,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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