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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사과 Jul 14. 2024

최후의 통첩

9

그렇다. 남편은 나의 사전경고를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게 마침내 나의 더러운 성질을 건드리고 말았다. 나는 영화 '모아나'에서 나오는 생명의 여신 테피티가 심장을 빼앗기고, 어느 순간 파괴의 여신인 테카로 변해 있는 모습과 똑같았다. 완전히 통제력을 잃어 화산이 폭발하듯 사정없이 뻗치는 분노와 억울함을 남편에게 퍼부었다. 감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장문의 휴대폰 메시지 따위로.



"제가 제대로 한 게 없다고요? 애 낳고 여태 키운 건 뭔데요? 내가 언제 한 번이라도 그냥 탱자탱자 놀았던 적이 있어요? 그동안 돈을 낭비하고 펑펑 쓰길 했어요, 사치를 부리길 했어요? 지금 감히 제 앞에서 돈 벌어 온다고 생색내는 거예요? 내가 그동안 애 낳고 키운다고 얼마나 헌신적으로 희생하며 살았는데, 말을 그 따위로 밖에 못해요? 배불러서 만삭일 때까지도 집밥 챙겨 먹이려고 매번 요리해서 도시락 싸서 여보 사무실에 갖다 바치고 살았어요. 아기용품 하나라도 아끼려고 그깟 천 원, 이천 원 아껴보겠다고 매번 당근마켓질이나 하고, 나를 위한 챙김 하나 없이 얼마나 구질구질하게 살았는데. 생활비 아끼겠다고 얼마나 애썼는데. 내가 뭐 수십 수백만 원 들여서 뭘 한다고 했어요? 이제 애 둘이나 되는데, 애들 기저귀값이나 과잣값이라도 보태보겠다고 뭐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거 배워보겠다는데. 배불러서 힘들어도 출산 전에 뭔가 좀 준비라도 해두겠다는데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심지어 임산부인 나한테??"

"저만큼 벌어오세요 그럼."



아무리 손가락을 바삐 움직여 온갖 말을 다 쏟아내고 감정의 폭발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이를 데리고 매번 저녁마다 도시락을 싸들고 차로 왔다 갔다 배달 다니던 모습이 떠올라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슬픔과 억울함이었을까, 감정의 소용돌이에 완전히 사로잡혀 버렸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심박수가 아주 가파르게 증가했다. 당장 이 남자가 앞에 서있었으면, 내 눈에서 나오는 레이저로 남편을 깡그리 태워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뭐라고요? 아니, 여보가 돈을 수천수억을 벌어서 나를 호강하게 해 주길 했어요, 뭘 했어요? 기껏해야 따박따박 나오는 공무원 월급쟁이 주제에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요? 저보고 결혼하기 전에는 일 안 해도 된다면서요, 몸도 약하니까 하지 말라면서요. 별과 달 따달라는 것 외에 제가 하고 싶은 거나 원하는 거 다 들어주고, 하게 해 줄 테니까 걱정 말라면서요. 그렇게 호언장담을 해놓고 이제 와서 뭐라고요? 돈 벌어 오라고요?

여태 제가 했던 거 이제 그럼 다 당신이 직접 하세요. 제가 돈 벌테니까, 당신 애는 당신이 키우세요. 결혼식부터 시작해서 여태껏 사는 동안 내가 해온 게 얼만데. 결혼식도 허례허식하기 싫다고 아껴보겠다고 직접 다 준비해서 셀프웨딩으로 했지, 집도 내가 다 일일이 셀프 인테리어해서 새집으로 바꿔놨지, 거의 쓰레기집 수준이던 시아버지 집도 임신해 있는 상태에서 한여름에 비행기 타고 왔다 갔다 해가면서 완전히 새집으로 고쳐드렸어요. 그동안 내 능력으로 호텔이며 비행기며 초호화로 플래니텀 멤버십에 퍼스트클래스에, 오죽하면 에티하드항공에 아파트먼트까지 태워줘 가며 여행 데리고 다녔건만. 그동안 내가 당신을 호강시켜 주면서 살았는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감히 뭐라고요?"

"제가 해달라고 한 적 없어요. 본인이 혼자 좋아서, 하고 싶어서 한 거지."



그야말로 점입가경의 대화였다. 나는 본인은 동의한 적이 없고 싫었다는 얘기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것도 쇠창살로 감싸진 큰 몽둥이로 아주 세차게 가격 당한 느낌이었다. 그동안 나와 함께 하는 결혼생활이 행복하다며 좋다고 했던 줄 알았다. 아이를 출산하고 키우는 과정의 나의 노고를 남편이 당연히 알 것이라 생각하고 인정해 주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남편에게서 듣는 그의 진짜 속 이야기는 크나큰 배신감을 느끼게 했다. 그 모든 동고동락을 함께 했으니 모든 순간들이 동의하에 이루어진 줄 알았다. 그런데 동의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맞춰준 거고, 원했으니까 그냥 따라줬을 뿐이라니.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단단히 착각하며 살았던 거구나. 사람을 잘 못 봤구나. 더 이상 이 사람과는 안 되겠구나.'



뱃속에 있는 둘째가 태어나기 전에 뭔가 수를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현실적인 압박감이 몰려들었다. 나는 남편의 단답형 대화를 뒤로하고, 이혼을 정말 빠르게 알아보기 시작했다. '빠르게 이혼하는 법'을 검색하자 협의이혼이니 조정이혼이니 다양한 사례와 방법들에 대한 정보가 쏟아졌다. '출산하기 전에 얼른 관계를 정리해야지, 당분간은 친정에 들어가서 빌붙어 살까, 당장 뭘 시작해서 돈을 벌어야 될까, 첫째 아이는 그럼 어떡하지? 첫째는 남편이 키우라고 하고 나는 둘째만 데려가서 살까, 아니면 첫째를 데려가고 둘째는 낳아서 던져놓고 가버릴까. 과연 둘 다 데리고 나 혼자 싱글맘으로 살 수 있을까? 잘난 네가 다 키우라고 둘 다 넘기고 그냥 룰루랄라 내 인생 다시 시작할까?'


별의별 온갖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한 생각을 해가며 살아갈 방법을 궁리했다. 무얼 선택해도 나는 아마 후회 하나 없을 거라는 것. 그동안 남편에게도, 아이에게도, 나의 모든 것을 다 태워가며 최선을 다했으니까 괜찮을 거란 생각. 일말의 아쉬움이나 미련이 하나도 남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이 있었다. 혼자 다시 살라면 해외 어딜 가서든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스스로가 아주 차갑고 무서웠다. 실제로 이혼을 알아보고 생각하기 시작하자 뜨겁게 반응하던 머리와 심장이 아주 냉랭하게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반면 서글프게도 수중에 내 돈이 하나도 없었다. 주 수입원인 남편의 명의로 모든 카드를 사용했고, 생계에 관련한 모든 수입과 지출을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통장잔고는 텅텅 비어있었다. 그야말로 상상만 하는 현실거지가 따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현실은 현실대로 방법이 생길 거란 이상주의적 사고로 자존심을 건 최후의 통첩을 남편에게 날렸다.

"앞으로 니 새끼 네가 키우세요. 우리 관계 이제 관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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