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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사과 Jul 15. 2024

기억해야 할 7년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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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기 훨씬 전의 일이다. 10여 년 전에 어디선가 부부 상담전문가라는 사람의 강연을 우연히 듣게 됐었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때 뇌리에 깊게 박혀 기억하고 있던 게 있다. 그건 바로 '7년의 비밀'이다. 물론 지금은 '이혼'이 워낙 사회적으로 수면 위로 많이 올라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오늘 날짜의 뉴스 포털만 봐도 어느 유명 연예인들이 오랜 결혼 생활 끝에 이혼을 했다고 기사가 뜨고, 텔레비전에서 이혼한 사람들을 위한 재혼 관련 예능 프로그램도 자주 접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이혼을 공개적으로 언급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단 두 글자를 통해 파장되는 여러 이미지와 각자의 상상들은 당사자들에게 또 다른 깊은 상처를 주는, 결코 말해봤자 좋을 게 없는 그런 것. 특히 여자들에게는 '저 이혼녀예요'라고 말하면 무조건 손해 보는 일이었다. (통계청에 의한 최근 10년간의 결혼 및 이혼 관련 수치를 찾아보면, 이혼율은 큰 차이가 없고 혼인율은 40%나 떨어졌다고 한다.)



정확히 그 강사가 어떻게 말했는지는 따로 기록해 두지 않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내가 이해해서 지금까지 기억하는 바는 이러했다. 결혼 후 7년까지는 무조건 같이 살아봐야 한다는 것. 7년 미만의 결혼 생활로는 애당초 이 사람과 맞고 안맞고를 이야기할 수 없는 거라고 말이다. 대부분 결혼 후 몇 년 채 되지 않아 '성격차이' 등의 이유로 이혼을 하는데, 사실 그건 어불성설이라고. 최소 7년은 살아봐야 그 사람에 대해서 조금은 '알기 시작'하기 때문에, 그 이후가 되어서 성격차이란 말이 비로소 인정된다고 했다. 미국 인디애나대학 킨제이연구소의 저스틴 레밀러 박사도 미국 심리학 전문매체 '사이콜로지 투데이'에서 결혼 후 7년은 결혼생활의 중요한 변곡점이라고 주장했다고 하는 기사를 보니,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던 게 맞다.

그 강사는 그 초기의 7년이 지나고 나서, 또 다른 7년이 지나면 그제야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무려 14년이란 시간의 결혼생활을 해봐야만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7년이 지나 총 21년의 시간을 살아야만, 그 사람의 눈빛만 봐도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고 했다. 7년 주기마다 찾아오는 결혼생활의 3단계 퀘스트랄까. 그래서 나는 7년의 비밀이라고 이름을 붙였고, 결혼을 하게 되면 꼭 7년은 버텨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2016년 겨울에 마치 영화 같은 설정으로 남편을 우연히 만났고, 그냥 아는 사람으로 지낸 지 3개월 만에 결혼을 하기로 약속했다. 첫 데이트가 되려던 자리에서 '나랑 만나볼래요?'가 아닌 '너랑 결혼하고 싶어'란 막무가내 돌직구를 날린 남편의 가당찮은 용기에 오히려 호기심과 관심이 증폭됐다. 그렇게 나는 혈혈단신으로 남편을 따라 제주로 내려왔고, 1년 미만의 동거생활을 거쳐 2017년 따뜻한 봄에 결혼식을 올렸다. 혼인신고를 결혼식 전에 미리 하고 살았으니, 혼인신고를 기준으로 하면 딱 결혼 7년 차가 되는 거였다. 출산 이후 유난히 버벅되는 나의 뇌 대신 손가락으로 몇 번씩이나 다시 세고 또 세어보았다. 2016년부터 1년, 2년, 3년, 4년, 5년, 6년,, 지금이 2022년이니까 7년. 진짜 딱 7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 나 지금이 최대 고비일 수밖에 없는 시기구나, 일단 이 악물고 조금 더 버텨봐야 되는 거구나.'



물론 텅텅 비어버린 통장의 현실적인 역할도 컸지만, 기억해야 할 7년의 비밀은 최후의 통첩을 이미 던져버린 나에게 일말의 후회를 남기기도 했다. 그때의 남편은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마음이었을까.

남편은 평소대로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일목요연하게 분석하거나 따지지 않는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러면 그런가 보지, 그게 나랑 뭔 상관이람 같은 태도. 이번에도 역시 이번 일에 대해 서로 대화 좀 하자거나, 무엇이 문제인지 서로 알아보자거나 또는 사과를 한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필요하면 부부상담을 받아보겠냐고 슬며시 물어볼 뿐이었다. 또 얼렁뚱땅 넘어가 버렸고 결국 그렇게 한동안 냉전이 흘렀다. 나는 꼭 필요한 대화 외에는 남편과 말을 섞지 않았고, 종종 딸 앞에서 남편을 투명인간 취급을 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됐다. 마치 거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신 양육을 해야만 한다는 필수 조건이 있는 셰어하우스에 사는 남남 같았다. 그렇게 남들 앞에서는 그냥 평범하게 잘 살아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실제 두 사람의 관계나 감정에서는 골이 점점 깊어지는 일종의 쇼윈도 부부가 되었다.



이대로 11월에 있을 둘째 출산을 맞이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부모사이의 갈등과 냉전을 그대로 느끼며 자라는 딸아이의 정서적 발달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대학에서 유아교육까지 공부하고 있는 나로서는 지금 남편과의 관계는 아이에게 죄를 짓는 일,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참에 내 더러운 성질머리도 완전히 뜯어고치고 싶었다. 나 같은 중생은 지금과 같이 해오던 일상적인 수련으로는 아직 한참 멀었다 싶었다. 큰 용기를 내어 심리상담을 받기로 결심했다. 어릴 적부터 만들어진 트라우마 같은 것들이 분명 지금 이 부부관계에도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 안에 들어있는 모든 이야기들을 끄집어내고 심리적 치료를 받아야만 무언가 절대적인 변화가 생길 것만 같았다. 때마침 제주에서는 만 39세 미만 청년들을 대상으로 심리상담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 상담비용의 일부를 지원해 주고 나머지만 부담하면 되는 바우처 지원사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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