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땡감이 영그는 시간
토요일 오후 여섯 시, 클로틸드에게 저녁 초대를 받고 에디와 집을 나섰다. 모에카와 파비엔느도 초대됐는데, 우리 넷은 5년 전 아이들을 매개로 만나 가까워진 후 자주 모여서 차도 마시고, 식사도 같이하곤 해왔다. 이 모임이 없었다면 나는 랭스에서 지금까지 살지 못했을 것이다.
클로틸드 집에 도착했을 때 모에카와 나엘, 파비엔느와 그녀의 딸 로즈가 와 있었다. 먼저 도착한 파비엔느가 문을 열어주었고, 클로틸드는 고기를 오븐에 넣으며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클로틸드 아버지의 취미는 사냥인데, 마침 아버지가 사냥한 사슴(Daim, 흰 반점이 있는 사슴의 일종) 고기가 있어서 사슴 요리를 준비했다고 했다. 프랑스에서는 허가증이 있으면 사냥을 할 수 있는데, 사냥 후 잡은 고기의 무게에 따라 세금도 내야 한다. 말하자면 사냥은 위험하고도 비싼 취미인 셈이다.
사슴 고기는 생각보다 훨씬 질겼다. 사냥한 야생 동물을 이렇게 먹어도 되는 걸까, 혹시 무슨 바이러스가 있지는 않을까 잠시 걱정하다 다들 나이프로 고기를 잘라 입에 넣는 걸 보고 나도 그냥 먹기 시작했다.
“나라면 담배꽁초를 모아서 그 집 앞에 갖다 놓겠어.”
클로틸드가 말했다.
“그러려다 말았어. 얼굴 맞대고 말하기 싫어서 간접적으로 경고하려는 걸 시비 건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당연히 시비 걸려고 하는 일이지!”
“이미 나만 보면 죽일 듯 노려보는데, 무슨 일을 당하려고.”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하루하루 보람차게 살아보려고 집을 나왔는데, 신경이 온통 윗집에 쏠려 단 1분도 소중하게 못 쓰고 있다.
“그런데 벨을 누르고 도망간 사람은 누굴까?”
“그러게 말이야. 그 사람 때문에 괜히 나만 오해받고, 상황이 더 꼬여버렸어.”
“그래도 다행인 거 같아. 너만의 문제가 아닌 거잖아.”
“그 사람이 누군지 알면 협력해서 같이 대응할 텐데.”
모에카의 말을 들으니 그 사람을 꼭 찾고 싶어졌다.
“옆 건물 알렉산드라도 아니고, 윗집 렁보 씨도 아닐 테고. 도대체 누구지?”
생각에 잠겨 사슴 고기를 씹는 데 어금니에서 와드득 소리가 났다. 스테이크 속에 숨어 있던 뼛조각을 씹은 것 같다. 간신히 딱딱한 물체를 꺼냈는데, 반투명한 하얀색인 걸 보니 치아 조각 같다. 설마 어금니가 부러진 건가? 고기를 몰래 뱉어낸 후 혀로 어금니를 느껴보았다. 혀끝에 낯설고 뾰족한 모서리가 닿았다. 이 상태로 고기를 더 먹는 건 무리였다. 내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자 클로틸드가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입맛이 없구나?”
“미안.”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나 때문에 모였는데, 어금니 걱정까지 얹어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다.
“잠깐만 기다려. 디저트는 아주 달콤한 거라 먹을 만할 거야.”
우리는 화제를 바꿔서 클로틸드의 새로운 남자친구, 막심에 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막심 같은 사람을 채팅으로 만나다니 진짜 행운이다.”
“사귄 지 얼마나 됐지?”
“6개월쯤? 다음 달부터 여기서 같이 살기로 했어.”
“뭐?”
나와 모에카는 깜짝 놀라 질문을 퍼부었고, 파비엔느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루이즈가 찬성했어?”
“좋아하진 않지. 그래도 뭐 어쩌겠어.”
나는 에디가 종종 날 원망하는 상황을 얘기했다. 클로틸드도 같은 상황이었으니 뭔가 대안이 있지 않을까.
“루이즈는 원망하지 않아?”
“태어나자마자 헤어져서 아빠한테 애착이 별로 없어. 지금도 1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하니까.”
“에디도 아빠랑 보낸 시간이 별로 없는데 이혼한다니까 갑자기 아빠를 아쉬워하네.”
“더 못 볼 것 같으니까 아쉬운 거겠지.”
“루이즈는 막심이랑 잘 지내?”
“그냥 서로 데면데면 한 편이야.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난 막심이 급하게 노력하지 않아서 좋아. 천천히 자연스럽게 가까워져야지, 본인은 애쓰는데 아이가 마음만큼 안 따라주면 지칠 테니까. 나도 사실 막심 딸이랑 데면데면하기도 하고.”
완벽하게 조화로운 상태가 아니라도 지켜볼 줄 아는 여유. 어쩌면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그런 마음가짐일 지도 모르겠다.
파비엔느는 큰아들이 해군사관학교에 가고 싶어 하지만, 육체적으로 힘들고 위험할 뿐 아니라 2년마다 전근 가야 하는 직업이 가족들에게 큰 고통이 될 수 있기에 반대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인 둘째 아들은 내년에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간다고 한다.
“일본어도 해?”
“아니. 한마디도 못 하지.”
“그런데 일본으로 간다고?”
“집에서 최대한 먼 나라로 가고 싶은데, 갈 수 있는 나라 중 가장 먼 나라가 일본이래.”
파비엔느의 대답에 우리는 다 같이 크게 웃었다. 내가 프랑스로 날아왔던 것과 같은 이유인 걸까? 파비엔느랑 크리스토프는 열린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하는 부모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냥 부모라는 굴레 자체를 벗어나고 싶은 거지. 독립된 객체로 홀로서고 싶은 마음.”
파비엔느는 서운할 수 있는 상황을 당연한 과정 중 하나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몇 년 후 에디가 똑같은 말을 한다면 나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있는 에디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그러기 힘들 것 같다. 머릿속에 경고등이 번쩍 켜졌다. 지금처럼 살다가는 내 삶과 에디의 삶을 혼동하게 될 것이다. ‘에디를 위해서’라고 하고 있지만 어쩌면 지금까지 나를 위해서 내 시간과 우주를 에디에게 퍼부었는지도 모르겠다. 에디가 독립하려 할 때 나의 사랑이 굴레가 돼서는 안 되는데.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
“그림은 잘 그리고 있어?”
“아니, 별로.”
층간 소음 때문에 정신이 산란해서 못 하고 있다 변명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아직도 내 삶의 우선순위가 다른 것들에 있기 때문이다.
나도 기욤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그 어떤 희생도 하지 않고 있다. 그림 역시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고 계속 미루기만 하면 시작도 못 하고 끝날 일인데도 계속 미루고만 있다. 다른 일에 밀리고 밀리는 우리가 과연 너한테 중요하긴 한 거냐고 기욤에게 따져 묻던 내가 떠오른다.
나는 디저트를 준비하러 부엌으로 향하는 클로틸드를 따라갔다. 그녀는 냉장고에 보관 중인 커스터드와 머랭을 꺼냈다. 클로틸드가 준비한 디저트는 내가 좋아하는 일쁠로땅뜨, 일명 플로팅 아일랜드(île flottante: floating island)다.
“이걸 집에서 만들었다고?”
내가 깜짝 놀라자 클로틸드가 빙그레 웃었다.
“완전히 망쳤어. 그냥 초콜릿 케이크나 구울걸.”
기욤 레스토랑에서 파는 일쁠로땅뜨와는 확연히 다른 모양과 맛이지만 클로틸드의 일쁠로땅뜨도 훌륭했다.
달콤한 커스터드 바다에 동동 떠 있는 부드러운 머랭 섬. 구름을 입에 넣으면 이런 맛일까. 혀에 닿자마자 살포시 녹으며 달달함을 남기는 거품의 매력에 나는 방금까지 머릿속을 부유하던 모든 상념을 잊을 수 있었다.
노란 커스터드 위에 떠 있는 머랭을 보고 있자니 문득 결혼이 떠올랐다.
두 남녀가 만나 자발적으로 만든 가정이라는 섬.
인간의 의지로 만든 이 섬은 안정적일 때 보다 위태로울 때가 더 많다.
처음 섬을 만들었을 때는 폭풍에 섬이 떠내려가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다가 그곳에서의 삶이 지치고 답답할 즈음이면 넓고 자유로운 육지를 그리워하게 된다. 분명 그 섬에는 각자의 배가 있다. 섬으로 들어갈 때 타고 갔던 배. 그 배를 타고 그리운 육지로 나오면 되지만 한번 만들어진 섬을 나오기는 쉽지 않다.
나 역시 육지로 나오기로 마음먹었지만,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내가 나오고, 기욤도 떠난다 해도 영원히 남아있을 그 섬과 거기에 남겨질 아이가 있기에.
“요즘 난 쌈닭이 된 느낌이야.”
내 말에 다들 웃기 시작했다.
“그러게, 기욤이랑 붙더니 K랑도 싸우고, 이젠 아마두 씨까지.”
“이사 갈까?”
내 말에 또 다 같이 웃음이 터져버렸다. 요새 내 하소연의 끝은 늘 저 말로 끝나서, <이사 갈까?>가 곤란할 때면 내뱉는 우리의 유행어가 되어버렸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사할 거면 캠핑카에서 살아야 할걸?”
혼자 있을 때는 심각하게만 느껴지던 문제가 친구들 앞에 꺼내놓으니 분위기를 띄우는 농담거리가 되었다. 당장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큰 위로가 되었다.
*
극으로 치닫던 윗집과의 갈등이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이사 초반에는 매 주말 파티를 하더니 요새는 그 횟수가 조금 줄었다. 대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행동이 하나 늘었다.
“엄마, 담배를 피우면 침이 많이 나와?”
“왜? 담배 피우다 침 뱉는 사람 봤어?”
“응, 윗집 형이 창가에서 침을 뱉어. 거기서 뱉으면 우리 테라스로 떨어질 텐데.”
“침을 뱉는다고?”
분기탱천해서 되묻자 에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은 다물었다. 담배꽁초가 예전보다 현저히 줄었기에 다행이다 싶었는데 침을 뱉는다니. 넓은 마음으로 웬만한 건 이해하며 더불어 살아보려 했는데, 도저히 안 될 것 같다.
화가 나지만 당장 따질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증거를 수집한 후 어떻게 공격할지 계획을 세워야 한다. 어쩌다 이런 시답지 않은 계획을 세우며 살게 됐는지, 정말 두 집 중 하나가 이사해야 이 날카로운 신경전이 끝나는 건지. 답답한 상황에 한숨이 나온다.
저녁 7시, 한참 저녁 준비 중에 벨이 울렸다. 이제는 벨 소리가 나면 심장부터 덜컥 내려앉는다. 아마두 씨가 온 거라면 어떻게 대응할지 머리를 굴리며 현관으로 향했다.
예상 밖으로 외시경 너머에는 키 큰 여자가 서 있었다. 뒤에서 쏟아지는 조명 탓에 까만 형체로만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렁보 부인이었다. 나는 문을 열고 그녀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갈색 생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렁보 부인은 무척 날씬했는데, 각진 턱과 동유럽 악센트 때문에 인상이 강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희 옆집 소음 문제로 상의드릴 게 있어서 불쑥 찾아왔어요.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옆집 소음 문제로 왔다는 말에 놀랍고 반가워 그녀를 얼른 거실로 안내했다. 차를 대접하려 했지만 렁보 부인은 한사코 거절했다.
“그 사람들 해도해도 너무 시끄럽지 않나요?”
렁보 부인이 얘기를 꺼냈을 때 가슴을 옥죄는 사슬이 툭 풀리는 기분이었다.
“렁보 부인도 힘드셨나요? 저는 사실 그 집이랑 전쟁 중이에요.”
나는 윗집 소음 때문에 부동산에 항의했던 일을 얘기했다. 내 말이 끝나자 렁보 부인이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내 앞에 펼쳐 보였다. 편지 상단에 찍힌 로고를 보니 우리 레지던스를 관리하는 부동산에서 보낸 편지였다.
“이게 뭐예요?”
“부동산에서 삼자대면을 요구하는 편지가 왔어요.”
“누구랑요?”
“아마두 씨 부부랑 저희 부부 그리고 부동산 담당자요. 아마두 씨가 항의 편지를 보냈나 봐요. 제가 자기들 삶을 과하게 침해한다고.”
“네?”
부동산에서 삼자대면을 요구했다면 두 집이 꽤 여러 번 부딪혔을 것이다. 도대체 그간 위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나한테는 이웃 간에 직접 대화로 문제를 풀면 될 걸 왜 부동산에 연락했냐고 따지던 아마두 씨가 항의 편지를 썼다니. 나는 그게 가장 황당하다.
“저는 직장이 파리라 새벽에 출근해야 하는 데 밤새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니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저희 침실 벽이 옆집 거실과 닿아있나 봐요. 음악 소리랑 사람들 소리도 시끄러운데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벽에 다트를 던지며 놀아요. 벽을 울리는 다트 소리 때문에 정말 미치겠어요. 방에서는 잘 수가 없어서 화장실에 매트를 깔고 잔다니까요. 여러 번 찾아가서 조용해 달라고 말했는데 소용없어요.”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만나니 반갑고 안도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분명히 렁보 씨는 별문제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렁보 씨는 소음이 크지 않다고 하셨는걸요? 저는 이 건물에서 저희 집만 소음이 크게 들리는 줄 알았어요.”
“그이는 집에서 늘 헤드셋을 끼고 tv를 봐요. 잘 때도 말이죠. 그래서 밖에서 나는 소음에 크게 영향받지 않는 거예요.”
“아. 그렇군요.”
본인은 불편하지 않지만, 아내가 힘들어하니 렁보 씨도 옆집에 대응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옆집에 찾아가서 얘기를 나눈 것이 꼭 나를 위한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샴페인을 선물했을 때 그렇게 난감해했던 걸까?
“저는 소음의 데시벨을 측정할 수 있는 기계도 샀어요. 기록을 남기려고요.”
“저는 핸드폰으로 녹음했어요.”
“저도 핸드폰으로 녹음하다 기계를 샀어요. 정확한 수치가 필요해서요. 이번에 부동산에서 제대로 해결을 안 해주면 소송하려고 해요.”
“소...송이요?”
“네. 어떠세요? 같이 하실래요?”
내년에 거주증을 갱신해야 하는데, 혹시 법적 분쟁에 휘말리면 10년짜리 장기 체류증을 받는 데 불리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제가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뭐든 도울게요.”
소송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우선은 돕겠다고 대답했다. 지금 가장 필요한 건 함께 맞설 동지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보다 더 지독하게 싸우려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더 큰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의를 불태워도,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싸워서 이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얼마 전에 아마두 씨가 집으로 찾아왔었어요. 벨 누르고 도망가는 짓을 한 번만 더 하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으니, 저희 말고도 누군가 불만이 있다는 거겠죠? 그분을 찾아서...”
“사실 그거 저였어요.”
“네?”
“벨 누르고 도망간 거요.”
“...네?”
“한밤중이었고, 남편이 자고 있어서 혼자 대면하기 겁났어요. 그래서 조용히 하라는 경고로 벨만 누르고 집으로 들어갔어요.”
“아... 네...”
덕분에 담배꽁초 세례에, 침 세례에, 제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네요,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지난 일로 간신히 만난 아군과 대립하고 싶지 않아 그만두었다.
“낮에도 음악 소리가 너무 크지 않나요? 거실 탁자에 둔 꽃병 속 물이 흔들릴 정도라니까요.”
“낮에는 제가 집에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옆 건물에 사는 브라질 부부에게도 물어봤는데, 그쪽은 별문제 없대요. 그 집도 복층이라 아마두 씨네 거실이랑 붙어 있는데, 침실이 반대쪽이라 자는데 별문제 없다고 했어요. 혹시 옆 건물 3층에 사는 분들을 아세요? 여러 가구가 함께 대응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삼자대면 후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소송을 진행할 거고, 함께 할 이웃을 더 찾아볼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소음이 심할 때 녹음도 하고, 부동산에 항의 서신을 보내며 계속 증거를 남겨달라고 나에게 부탁했다. 렁보 부인이 이야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그녀의 강아지가 떠올랐다.
“요새 강아지가 안 보이던데 어디 갔나요?”
“죽었어요.”
“네?”
“문틈으로 나갔었나 봐요. 한참 찾아다니다 지하주차장 구석에서 녀석을 발견했는데, 죽은 채 뻣뻣하게 굳어 있었어요.”
“어머나...”
“너무 사랑했었는데.”
“왜 갑자기 그런 일이 생긴거죠?”
“병원에 데려가 보니 쥐약을 먹었대요. 그래서 지하주차장을 샅샅이 뒤져봤는데 증거를 못 찾았어요.”
“마음이 힘드시겠어요.”
“네, 너무 힘들어서 새 아이를 바로 입양했는데, 후회하고 있어요. 비교만 될 뿐 대체가 안 되네요.”
“그럴 것 같아요.”
렁보 부인이 문을 나서려다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쥐약을 누가 먹였을까요?”
“네?”
“여태까지 없던 일이 갑자기 생겼어요. 그러면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이랑 연관 있지 않을까요? 저한테 원한이 많기도 하고.”
“아…. 네….”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사실 내게는 과한 추측일 확률이 더 커 보였다.
“조심하세요. 정말 보통 험악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나의 이성은 아마두 씨가 한 일이 아닐 거라고 확신함에도 렁보 부인의 마지막 말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렁보 부인이 돌아간 후 층간 소음에 관련된 범죄를 검색해 보았다. 정말 말도 안 되게 끔찍한 사건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기사 속에 등장한 사건들은 소음 공해를 당하는 피해자들이 참다가 격해져서 범죄를 일으키지 가해자가 피해자를 찾아와 해코지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래도 겁이 났다. 석 달가량 계속된 소음으로 마음에 병이 든 건지, 이웃 간의 분쟁이 주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딱히 신경 쓸 일이 없을 때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한 마음이 들어 어쩔 줄 모르게 되곤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심하게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자다가 벌떡 깨는 일이 잦았고, 잠을 푹 자지 못해서 늘 피로하고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러다 급사하는 게 아닌가 걱정되기 시작했을 즈음, 주치의인 필립을 찾아갔다.
필립은 별일 아닐 거라고 말하면서도 피검사와 혈압, 심전도 검사를 꼼꼼히 했다. 편안한 미소를 띠고 나를 안심시켰지만 어쩐지 그의 행동은 급박해 보였고, 민첩하게 심장내과 전문의에게 직접 전화를 걸더니 응급으로 예약을 잡아버렸다.
심장 내과 대기실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모든 환자가 나를 유심히 관찰하는 게 느껴졌다. 모두 은퇴한 지 십 년쯤 지난 할아버지, 할머니였다. 어르신들 사이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자니 진찰도 하기 전에 서글프고 울적해졌다.
잠시 후 키가 크고 풍채가 좋은 의사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며 대기실로 들어왔다. 그는 나에게 악수를 청하며 기본적인 안부를 묻고는 진료실로 인도했다. 간단한 문진 후, 심장 초음파와 심전도를 진행했고, 24시간 홀터기를 차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양한 검사를 한 결과 나는 당장 약을 먹어야 하는 상태였다. 병의 원인을 물었을 때 의사는 내 체격과 나이를 고려하면 딱히 발병할 이유가 없어서 원인 불명으로 봐야 한다고 대답했다.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스트레스일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대부분의 의사들이 딱히 원인을 찾을 수 없을 때 하는 대답이지만 내게는 매우 정확한 원인으로 들렸다. 내 삶을 뒤흔든 이혼 결정과 이사, 끊임없이 고막을 침범하는 소음 공해와 윗집과의 분쟁. 극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된 건 사실이니까.
심장의 부담을 줄여주는 약을 처방받았다. 다행히 약을 먹으면서 두근거리는 증상과 한밤중에 빨라진 심장 박동 때문에 잠에서 깨는 일은 줄어들었다. 두근거림이 줄어드니 불쑥불쑥 불안해지던 마음도 한층 안정되고 괜한 걱정에 사로잡히는 일도 사라졌다.
문제는 약을 먹으면 온몸에 기운이 빠지고 온종일 잠만 쏟아진다는 것이었다. 걸음걸이도 느려져서 몽유병 환자가 몽중에 어슬렁거리는 듯 천천히 걷고, 약에 취한 듯 해롱댔다. 근래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무기력증까지 시작되어 허무한 감정이 심신을 점령해버렸다.
“필립? 이거 혹시 신경 안정제 같은 거야?”
약을 복용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나는 필립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아니, 심장의 부담을 줄여주는 약이야.”
“근데 왜 이렇게 힘이 없고 종일 졸리지?”
“혈압계 있지? 혈압 재봐. 너무 낮으면 반 알로 줄여야 해. 몸이 작아서 효과가 세게 나타날 수도 있거든. 약에 적응하려면 몇 주 정도 걸려. 일주일 더 지켜보고도 계속 증상이 지속하면 연락 줘. 내가 보고, 전문의를 다시 만나야 하면 빨리 예약해야 하니까.”
필립에게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약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한 번 복용하기 시작하면 평생 먹어야 하는 약이었다. 운이 좋으면 서서히 끊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계속 용량을 늘려간다는 게 정설이었다. 건강 관리에 소홀했던 나 스스로를 탓하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걸리는 병이 빨리 찾아온 이유가 뭘까 속상하다, 그래도 약이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널뛰는 감정을 가라앉히는 데는 일에 몰두하는 게 제일이다. 나는 산란한 마음을 다잡고 팔레트에 물감을 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