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의 두 큰 전환점
사회에 나와 스스로 돈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경제는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자연스럽게 공부하며 미국국채금리, 환율과 같은 경제지표들을 매일 살펴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지표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인문학적인 소양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920년대, 미국은 산업 혁명과 기술 혁신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금융 시장의 붐으로 경제는 급속히 성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 성장은 일종의 버블을 만들어냈고, 이는 장기적인 불안정을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주식 시장에서의 과도한 투기와 부동산 가격 상승, 과잉 생산 등은 경제 불안정의 씨앗이 되었다.
1929년 10월 29일, ‘검은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주식 시장 대폭락은 이러한 불안정성이 폭발한 순간이었다. 그날, 뉴욕 증시에서 주식들이 폭락하며 수백만 명의 투자자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주식 시장의 붕괴는 단순한 금융 위기를 넘어서, 전 세계 경제의 대공황을 촉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경제대공황은 단순히 주식 시장의 붕괴에 그치지 않았다. 전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수많은 은행들이 파산하면서 대규모 실업과 생산력 감소가 일어났다. 특히, 1930년대에는 산업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각국의 경제는 깊은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미국은 물론, 유럽과 일본, 그리고 다른 국가들도 대공황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대공황의 여파로 많은 나라들이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하며, 자국 내 산업 보호에 나섰다. 이로 인해 국제 무역이 급감하였으며, 돈의 흐름이 막히니 각국의 경제 회복은 더욱 늦어지게 되었다.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정부들의 대응은 다양했다. 특히,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을 통해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한 대규모 공공사업과 금융 개혁을 추진했다. 이 정책은 대공황의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계층을 지원하고, 경제의 재건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반면, 유럽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극단적인 정책들이 채택되었다. 특히, 히틀러의 나치당은 경제 회복을 위해 강력한 국가 개입과 군비 확장을 선택하며 독재적인 체제를 구축했다.
1973년, 제1차 오일쇼크는 다시금 세계 경제에 큰 충격을 안겼다. 이 사건은 아랍 석유 생산국들이 석유 수출을 제한하면서 발생했다. 당시 중동 지역의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과의 전쟁 중에 서방 국가들, 특히 미국의 지원에 반발하며 석유 수출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 결과, 국제 유가는 급등했고, 석유 가격의 상승은 전 세계적인 경제 불안을 초래했다.
오일쇼크로 인해 기름값이 급등하면서 산업 생산과 물가 상승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곧 인플레이션을 가속화하고, 경기 침체를 유발하는 악순환을 만들었다. 특히, 석유에 의존하는 산업들이 많은 선진국들의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두 번째 오일쇼크는 1979년, 이란 혁명과 이란-이라크 전쟁 등으로 인한 석유 생산 차질로 발생했다. 이란의 석유 생산이 급감하면서, 국제 유가는 다시 급등했다. 또한, 미국과 유럽 등 석유를 많이 소비하는 국가들은 석유의 부족 문제와 가격 상승에 직면했다.
두 번째 오일쇼크는 첫 번째 쇼크와는 다르게, 석유 생산의 단기적인 제한뿐만 아니라, 중동 지역의 정치적 불안정이 장기화되면서 지속적인 공급 불안정을 가져왔다. 이로 인해 1980년대 초반까지 세계 경제는 어려운 상황을 겪게 되었다.
오일쇼크는 각국의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가장 큰 문제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었다. 즉, 경제 성장 둔화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일어나는 경제적 상황이었다. 특히, 서방 국가들은 고유가로 인한 경제적 압박을 받았고, 생산성 저하와 실업률 증가 등의 문제에 직면했다.
하지만 오일쇼크는 각국의 에너지 정책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에너지의 효율적인 사용과 대체 에너지 개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석유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