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페이크 사건과 1020 남성 포비아
몇 해 전 어느 낯선 도시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주변 경관을 살피며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었다. 그때 나보다 한 뼘 정도 키가 큰 사람이 마주 보며 걸어오는 게 보였다. 도로 폭은 두 명이 간신히 지날 만할 정도로 좁았다. 본능적인 불안함은 이유가 없다. 그리고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는 경계로 이어진다.
바로 앞까지 가까이 다가온 그는 이제 막 아이 티를 벗어난 소년이다. 눈을 마주친 순간 그 청소년은 살포시 웃으며 인사한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나지막한 음성이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흔히 건네는, 별로 특별하지도 않은 의례적인 인사말. "할로(hallo, 안녕)". 긴장이 풀리며 미소가 나왔다. 혼자 경계를 세운 게 머쓱해지고 왠지 그 애에게 미안함이 들어서 뒤돌아보았다. 멀어지는 아이 모습을 한번 더 눈에 담았다. '잘 컸구나, 아들아'. 나지막이 읊조렸다. 소년의 인사는 알 수 없는 감정과 의문을 불러온다. 의례적이고 무심(無心)한 인사에서 오히려 다정(多情)을 느끼는 모순된 감정 말이다. 우리나라 같은 연령대 아이들은 이 상황에서 어떠한가 하는 질문 말이다.
독일 학교는 중고등학생이라도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공부하지 않는다. 대부분 오후 1시경, 늦어도 오후 3, 4시 전에 하교한다. 아이들은 대부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하교한다.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아이들은 한 줄로 자전거를 타고 가며 행인이 놀라지 않도록 간단히 신호를 준다. 자전거 벨을 살짝씩 눌러 자신들이 지나감을 알려준다. 학생들이 연거푸 "할로", "할로"를 외치며 지날 때는 무슨 게임을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나는 행인들도 여러 방식으로 장난스레 그 인사를 받아준다. 학교 앞에는 그 흔한 문구점이나 학원도 없고, PC방, 노래방, 화장품 가게도 없다. 학교에서 나와도 어디 들를 데 없이 자연스레 집으로 간다.
아래층에는 20대 청년 혼자 산다. 그는 동네 은행이 직장이라서 걸어서 출퇴근한다. 오후 5시경이면 마당에 나와 있는 그를 자주 본다. 해질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앞마당에서 뭔가를 한다. 어느 날은 나무 바구니를 만들고 다른 날에는 원하는 색이 제대로 나올 때까지 여러 번 칠한다. 현관을 지나다니며 그와 마주칠 때면 그 바구니를 자전거에 달고 장을 보러 갈 거라거나 오늘은 어디까지 하이킹을 갔다 올 건지 말해주기도 한다. 그는 음악감상과 식물 기르기 취미도 있다. (물론 얼마 못 가 시들어버린 화분을 그가 내버릴 때마다 내가 가져와 살린 식물만 몇 개 인지 모른다)
이곳, 독일에서 만난 1020은 (한국의 그 연령대보다) 덜 무섭다. 개인적인 감상이긴 하나, 그들에겐 어딘지 모르게 느릿느릿 시간을 채우는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눈인사하고 회전문을 잡아주며 꽃과 식물을 가꾸고 여가를 즐기며 다소 심심하게 살고 있는 그들이다.
동시에, 올해 8월 우리나라 청소년 범죄의 악랄함과 잔혹함을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올해 딥페이크 범죄사건에서도 1020 남성 가해자율은 매우 높다. 또한 그중 70%는 10대 가해자라고 한다. 우리네 아들은 물론 내 남동생, 이웃집 오빠, 남자친구, 아는 남자애들이 '잠재적 가해자'인 셈이다. 이 얼마나 놀랄 일인가.
가히 ' 1020 남성 포비아(povia) '에 쌓여있다고 할 수 있다. (포비아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써, 특정한 상황, 활동, 대상에게 공포심, 두려움과 불쾌감을 느껴서 회피한다.) 한 명 또는 한 무리의 1020을 골목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우리가 느끼는 그 감각이 딱 이것 아닌가. 공포와 회피말이다.
어쩌다 우리는 우리 아들들에게 이런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자문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어느 누구도 1020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 같은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1020들은 가정, 사회 어디서도 그 위치가 불안하다.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다. 어린이도 아니지만 독립적인 어른도 아니다. 어른의 보호와 통제를 받는 미성숙한 사람 그 중간 어디쯤에 있다.
학교에서는 딥페이크 예방을 위한 과목을 의무적으로 편성하여 '디지털 윤리의식'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 관련 전문가를 소집하고 딥페이크를 분별하고 대응할 수 있는 기술커리큘럼을 개발해야 한다. 현직교사들이 학생들을 딥페이크와 같은 범죄에 대해 예방기술을 가르치고 대응할 전문역량을 연수기간에 제공받아야 한다. '몰카는 범죄'라는 인식도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뤄졌다. 이제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딥페이크도 범죄'라는 인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 딥페이크 범죄는 1020 남성을 비난하거나 개인 윤리성에 기대해서는 해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개인이 가진 도덕성과 윤리에 기대해서는 딥페이크와 같이 새로운 기술을 이용한 첨단범죄는 근본적으로 근절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부, 지방정부는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번 딥페이크 사건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정부 대책의 미흡과 부실한 법과 제도적 허점이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 하나의 짤이 인터넷에 돌아다녔다. "학생이라는 죄로, 학교라는 교도소에서, 교실이라는 감옥에 갇혀, 출석부라는 죄수명단에 올라, 교복이라는 죄수복을 입고, 공부라는 벌을 받고, 졸업이란 석방을 기다린다."
나는 이 짤을 보자마자 미셸 푸코의 [처벌과 감시]를 떠올렸다. 이 짤을 만든 이가 미셸 푸코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나라 학생 존재를 매섭고 예리하게 표현한 것이라 놀랍다. 미셸 푸코는 [처벌과 감시]에서 학교, 병원, 감옥은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미셸 푸코는, 근대에 발생한 이 세 체계는 감시와 처벌의 기제가 공통적으로 작동한다고 분석하였다. 학생, 환자, 죄인들은 감시받고 있으며 스스로 결정하고 누릴 자유가 없이 제한된 자유만 있을 뿐이다. 각각 해당하는 장소에서 자의로 벗어날 수 없으며, 일정시간 동안 묶여 있어야 하기에 퇴원, 퇴소, 하교를 자유의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1020은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미셸 푸코의 비유에 가장 들어맞는 상태에 있다. 학교에서 이들은 주인이 아니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학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인 것이다. 인권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되지만 학교 교문 앞에서 자주 멈추기 일쑤다. 학교 안에서 아이들은 자주 인권침해에 시달렸다. 치열한 입시경쟁에 찌들어 자신과 남을 돌볼 여유가 없다. 약자를 보호하기보다 자신을 해하거나 남을 해하는 존재가 된 셈이다.
그리고 많은 청소년단체와 인권단체들이 노력하여 제정했던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되기 시작하며 '학생 인권'이 또다시 도마에 올랐다. 그리고 2024년 9월, 22대 국회에 '학생인권법'이 발의되었다.
우리나라 1020은 '노키즈존( no Kids zone)'의 버릇없는 아이거나 '중2병' 걸린 환자이거나, 이제는 사이버범죄의 잠재적 가해자,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MZ.
이것이 정당한가 의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