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브림 May 24. 2024

도착했다 내 노동!

행거를 샀는데 망치가 딸려 왔다

두 번째 자취방으로 이사를 오면서 가장 중요하게 사야 할 물건은 행거였다. 붙박이 장이 하나도 없는 7번 방의 구조 때문이었다.


완제품이나 설치 기사가 와야 하는 가구의 도입은 5년 차 자취생에게도 아직 먼 미래 문명이었다. 일말의 의심도 없이 저렴하고 이동이 편리한 조립식 대형 행거와 화장실에 필요한 스테인리스 선반도 조립식으로 함께 구입했다.   


[구입했다 : 구매할 물건의 대략적인 크기를 재고, 색감을 정하고, 디자인을 정하고, 몇 날 며칠을 여기저기 맘에 드는 물건을 찜해두고,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를 반복하고 비교하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으니 ‘어서 결정을 내려 이 할 일 많은 1인가구 세입자씨’ 셀프 혼내기를 시도, 주문하기 버튼과 뒤로 가기 버튼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주문하기 버튼을 눌렀지만 예전 주소잖아 정신 안 차려? 와 같은 일련의 모든 내적 생쇼 과정을 포함하여 물품 소유 행위를 끝마침] <자취백과>


갖은 비교와 분석 그리고 번복 속에 어렵사리 손에 넣은 물건들은 배송 후부터가 진짜 시작이니 아직 지치긴 이르다. 돈이 없고 비싼 가구를 들이기 부담스러운 자취생은 언제나 이 ‘조립식’으로 시작하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이었는지를 이사 때마다 잊어버린다. 비록 돈과 육체노동의 섬뜩한 물물교환에는 성공했을지라도 말이다.  


띵동. 도착했다,

내 노동!


두 개의 택배 상자 중 좀 더 커다란 것을 먼저 택했다. 상자 안엔 수많은 봉과 부품들이 들어 있었다. 모두 꺼내서 마룻바닥에 펼쳐뒀다. 다 꺼냈다고 생각했는데 상자가 아직 묵직했다. 저 깊은 곳에 고무망치가 보였다.  


서늘하다.

가슴에 "왜 그동안 더 벌지 못한 거야?"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나의 미래를 두들기라는 뜻인가. 나는 참으로 자연스럽게 한 손으로 망치를 쥐었고 노련한 스냅으로 몇 년차 목수에 버금가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천장만 한 높이에 옆으로 5단짜리 선반이 붙어있던 행거는 1단부터 차근차근 조립해야 했다. 연결 부품에 기둥을 하나 또 두 개를, 요리조리 두들기며 땀을 뻘뻘 흘리고서야 대형 행거 하나를 완성시킨다.


는 무슨. 조립 방향을 잘 못 잡아서 다시 풀고 다시 두드리고를 반복, 이렇게 돈을 열심히 벌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기는구나 정신 이상 증세로 나와의 대화를 몇 번 나누다 보면 어느새 완성된 행거에 옷을 걸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 뿌 듯 해  


양팔을 감싸고 잘했다고 내가 나를 칭찬한다. 참, 아직 화장실 선반이 남았지. 정신을 차리고 두 번째 박스를 개봉한다. 고작 허벅지 정도 높이의 스테인리스 선반은 조립이 얼마나 쉬우면 설명서도 한 장 안 들어 있을까. 맘 편히 부품들을 꺼내어 총 3층의 선반 중 1층에 기둥을 하나 박기 시작할 때였다. 기둥과 선반을 연결하는 부품이 어떻게 해도 안 끼워졌다.


이건 분명 잘못 만든 걸 거야


확신의 주먹질로 그리고 마침내 있는 힘없는 힘 다 짜내어 눈물까지 핑! 보고 싶은 엄마를 외치며 겨우 기둥 하나 세우는 것에 성공한다. 말도 안 된다고?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보자. 기둥은 총 세 개고 층은 3층이니까 8번만 더 하면 되겠네. 아 신나. 손가락 마디는 피의 흐름을 잃을지 오래, 자취건축전문가는 결국 화장실 3층 석탑까지 완성시키고 나서야 기절초풍한다.


시뻘게진 손가락 마디로 고작 샴푸, 린스, 바디워시 삼총사를 집어 들어 선반 위에 올리면서 인생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알싸한 감정이 스쳤다. 당분간 오늘의 집 접속 금지.    


하루사이 넋을 많이 잃은 오늘의 건축가는

할 말이 많아 보인다.


조립이 아버님께

“무한 조립인생은 이쯤으로 됐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아주 아주 만약에 말입니다. 그냥 가정을 하는 거예요. 아주 아주 아주 만약에 혹시나 제가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면, 또 아껴야 한다, 이사 가야 한다는 생각에 조립식 물건을 산다면 말이죠. 그래도 우리 적어도 인간적으로 '조립'정도는 쉽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던지(이를 악 문다), 아니다 애초에 가볍고 싸면서 오래 쓸 수 있는 무료배송의 예쁜 완성형 제품들을 좀 더 많이 만들어주는 건 어떨까요.(애처롭다) 저 그럼 정말 감사할 것 같은데. 거기 혹시 듣고 있나요."


혼자 살면 혼잣말이 는다.


이전 10화 사실 제 집입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