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매거진 속의 코너~ 「샛 글」 입니다. 갑자기 뭐냐구요? 원래의 이 글들의 방향이 다른 분야의 시각과 같이 물리를 읽는 것인데요.샛 글에서는 조금 더 깊게 여러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물리에 더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넘어가셔도 좋을 듯 합니다~ (물론 함께 해 주시면 감사하죠~ ^^)
그 처음 이야기는 '시간'입니다. 전에 말씀을 드렸었죠? 서양과 동양 과학을 가장 크게 가른 것은 바로 '시간'에 대한 접근 이라구요. 동양도 주기적으로 변화하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흐름과 맞물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자연과의 어우러짐을 바탕으로 하기에 이러한 시간의 흐름에 결을 맞춰 사는 것을 추구하죠.
하지만, 15세기의 서양은 다른 듯 합니다. 자연을 지배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은 오래전부터 이어오던 시각인데, 여기에 사람 중심이 더해지죠? 그리고 신과 같은 본질은 오히려 추상화됩니다. 사람이 충분히 머리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 흐름에 '시간'이 놓여 있습니다. 시간은 무엇일까요? 아주 객관적이고 본질적인 시간은? 자연의 변화에 발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예측하는 기준으로서의 시간. 왜냐면 결국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는 것이 법칙이니, 그 모든 것의 기준은 절대적인 척도로서의 '시간'이어야 하니까요.
여기서 물리가 택한 길은 역시 기하학적인 접근이었던 듯 합니다.(여러모로 고대 그리스와 닿아있죠)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공간을, 그래서 선을 균질적인 점의 집합으로 보듯, 시간도 그 길을 갑니다. 이렇게 시간의 축을 굳게 세우고, 모든 규칙의 독립변수로 자리매김 시킵니다. 어떤 의미냐구요? 여러분이 자주 보셨을 그림이 아래 있습니다.
<그림> 등가속도운동 시간그래프, 출처:http://file1.megastudy.net
보시면 가로축이 시간이죠?일단 마치 시간을 공간처럼 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그림이 가속도인데, 시간에 대해서 일정한 등가속도 운동이니, 그냥 똑같죠? 그에 비해 속도는 일정하게 증가합니다, 시간에 대해서. 가속도 곱하기 시간이 속도니까, 첫번째 그래프의 면적이 속도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두번째 속도 그래프의 면적이 위치가 되죠. 세번째 그래프 보시면 갈수록 시간에 따라 더 빨리 멀어지죠? 여러분이 공을 떨어뜨릴 때 생각해보시면 그러하죠.
물리책 처음에 지겹게 보시던 그래프에 많은 전제가 있던 것 같죠? 일단 모든 기준은 추상적으로 절대적 기준이 된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공간처럼 균질한 것으로 다룹니다. 그리고 분석을 시간의 축을 써서 다룹니다, 공간처럼!
이 마지막 문장은 정말 혁신적인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으로도 그렇지만, 직관적으로 이해하기에 이만한게 없거든요. 과학 공부하시는 분들은 시간에 따른 그래프를 얼마나 많이 보십니까! 공간처럼 투영해서 추상적인 것들을 처리하는 것!
시간이 균질하지 않다면? 그래서 저 그래프의 가로축이 고무줄 같이 맘대로 늘었다 줄었다 한다면?말도 안되겠죠. 절대적 기준인 시간은 균일하게 도도히 흘러야 하는 것이죠.
제가 이 이야기를 굳이 강조하는 것은 이유가 있겠죠? 매우 대조적인 두 가지 이유입니다. 첫 째는 그래서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예측의 과학이 가능했다 이고, 둘 째는 그것이 사람에게 매우 큰 문제를 일으킨다는 이야기도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자, 시간도 공간처럼 다룬다고 했죠? 그렇다면, 눈금이 있을텐데요. 위치를 몇 미터 같은 숫자로 나타내듯, 시간도 몇 초 같은 숫자로 나타내겠죠.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요? 즉 1미터라는 것의 기준은?
위치(길이)에 대한 것은 아마 들어보셨을 거에요. 프랑스에서 1미터의 기준을 만들어서(미터 원기)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것과 똑같이 복제해서 가져가고, 각 국가 안에서도 역시 복제해서 사용하죠. 모든 정량화된 것의 기준은 이렇게 마련되어야 합니다. (물론 최근에는 빛으로 정의 하기도 하는데, 결국 원천은 여기입니다.)
이렇게 하면 지구상 어디에서든 표준화된 길이의 기준을 가지는 것이죠. 그렇다면 시간은 어떨까요. 이것도 그런 원기 같은 것이 어디에 있을까요? 어, 그런데 시간을 어디에 붙잡아 둘 수도 없고.. 어떻게 할 수 있죠?
여기서 놀라운 방식이 나타납니다. 시간은 원기가 없습니다. 잡아 둘 수가 없으니까요. 그보다는 훨씬 보편적으로 정량화가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진자의 운동 같은 것으로 하니까요. 주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부터 정의하는 것이죠. 일정 거리를 반복하는 운동을 통해, 그 반복하는 시간으로 간격을 정하는 거죠.
어, 하지만 진자가 한 번 반복했을 때를 몇초로 해야 할까요? 이래서야 자의 기준이 없이 눈금만 내 맘대로 그은 것과 뭐가 다르죠? 여기서! 엄청난 방법이 나타나는 것이죠. 답부터 말씀드리면
주기 = 2π √(l/g)
= 2×3.14×√(진자길이/9.8)
이렇습니다. 일단 알 수 있는 것은 같은 거리를 반복하는 진자로 정의 한다면, 당연히 거리(길이)가 들어 가겠죠? 시간은 일단 거리를 통해 정의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리고, 저 시간 간격은 뉴턴의 법칙에서 계산됩니다. 즉, 시간은 법칙에 의해서 정량화 된다는 것이죠! 희한하죠? 시간이 정의 되어야 법칙이 나오는데, 법칙을 통해서 시간이 정의 된다니.
시간은 독립변수 임에도 공간을 통해 정량화 됩니다. 그리고 법칙을 통해 정량화 됩니다.
그리고! 이미 전제되었던 가정. 시간은 균일하게 흐를까요? 이것은 증명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은 사실 무리수죠. 답하기 어려운 걸 물으니까요. 독립변수인 것의 성질을 증명하라니. 일종의 공리 같은 것이니까요.
그런데, 바로 여기에 시비를 거는 사람도 나타났으니, 베르그송 이라는 사람입니다. 시간은 정말 중요한 지표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죽습니다. 모든 경험은 시간이 흐르며 겪구요. 시간에 대해 접근하는 태도는 삶의 방식을 결정하죠.
사람의 경험과 동떨어져 객관적이고 균질적으로 흐르는 시간이라는 것이 진실이라면? 인간의 모든 경험도 그에 따라 규정하려 들겠지요. 그 극한에 테일러리즘이 있습니다. 인간의 노동을 시간에 따라 모두 세분화하여 객관적으로 분해 한 뒤 종합하여 제조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정신. 이것은 아직까지도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운영의 원칙으로 말이죠. 그리고 인간 행동의 과학적 분석으로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노동이 이렇게 정의 된다면, 다른 행동들은 어떨까요? 심리적, 의학적, 교육적, 사회적... 등등의 접근에 과학적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더구나 소비자 행동 분석을 과학적으로 한다면?20세기까지 우리의 삶에서 조금씩 숫자의 영토가 확장되어 가는 것 같지 않나요? 그리고 법칙화 되며 제어 가능성이 넓펴지는 듯한 느낌은 착각일까요?
이런 부분에 문제를 제기한 거죠, 베르그송은. 우리의 시간 경험은 결코 균질하지 않다, 그리고 기존 규칙에 투영되듯 정의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시간에 대해 특별히 이야기하는 것은 과학에서의 독립변수로 이것을 기준으로 모두 재단되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정량화된 시간에 따라 회사든 학교든 행동이 통제되고 있음도 사실이니까요. 과학적 접근을 초월하려는 생철학적 입장에서 시간에 민감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입니다.그래서 공간화 되어 제어의 기준이 되는 시간에 대해 극렬한 반발을 하는 것 아닐까요.
시간에 대해 꽤 길게 이야기 했네요. 주제는 '시간은 균일하게 흐를까?' 였죠? 아래의 이야기로 마무리하려 합니다.
음악 녹음실에는 메트로놈이 있습니다. 같은 길이를 반복해가며 똑딱똑딱 마디의 시간 길이를 알려주죠. 이것을 기준으로 녹음 합니다.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50~60년대의 재즈인 하드밥 녹음들을 보면 시간의 흐름이 일정치 않아요. Grant Green의 'Idle Moment' 같은 음악은 시작에 비해 끝날 때 두 배 느려지기도 하죠. 그래서 훨씬 Idle Moment로 빠져듭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 감각의 흐름인 리듬의 인터페이스가 재즈의 느낌을 살리지 않을까 하는, 메트로놈에 맞추면 그 음악이 나올까 하는 생각을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