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고통을 삶의 축복으로 만드는 비결
삶의 모든 순간이 즐거움과 행복으로 가득한 사람은 없다. 고통은 매 순간 우릴 따라다닌다. 고통과 기쁨은 죽어도 떨어지지 않는 천생연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 마음은 어떨까? 고통과 기쁨이 나란히 서서 문을 두드릴 때, 기쁨만이 우리 인생 속에 들어와 주길 바란다. 우릴 아프게 할지도 모를 고통이 기쁨과 함께 우리 인생으로 들어오는 것이 두렵다. 그러니 고통이 무엇인지, 왜 우릴 찾아왔는지 알아보기도 전에 고통을 피하고 문전박대한다. 중요한 건 기쁨이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한 축복이듯, 고통도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축복이란 사실이다. 고통이 늘 곁에 있었기에, 우리는 살아올 수 있었다.
고통과 기쁨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연인이고, 이 둘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 있다. 고통과 기쁨이 머물다 간 마음 구석에서 수줍게 피어나는 ‘감사함’의 꽃이다. ‘기쁨이 감사한 건 알겠는데, 어떻게 고통이 감사할 수 있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세계적인 외과 의사이자, 한센병 전문가로 평생 활동한 폴 브랜드 교수는 저서, 『고통이라는 선물』에서 고통의 의미를 전했다. 고통이란 우리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게 하는 고마운 감각이라는 것이다. 한센병은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이 병을 앓는 환자는 손발이 썩어서 뚝뚝 떨어져 나가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한센병 환자들이 간절히 바라는 감각은 다름 아닌 고통이다.
저서 『고통이라는 선물』에는 폴 브랜드 교수가 진료한 환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여러 이유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환자들이다. 탄야라는 여자아이는 선천적으로 고통에 무감각한 희귀한 질환을 앓고 있었다. 탄야는 18개월부터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서 피를 내고는 피로 그림을 그렸다. 부모가 깜짝 놀라 말렸지만 탄야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 그런 행동을 즐겼다고 한다. 커가면서 발바닥에 압정이 박히거나 다쳐도 걸어 다니고, 자신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안전을 위해서 부모가 감아놓은 붕대는 소용없었다. 각종 상처로 피부조직은 괴사가 일어나고 결국 다리와 손가락을 거의 잃었다고 한다.
“아이의 상처는 치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경고체계가 없습니다” 폴 브랜드 교수가 탄야 어머니에게 한 말이다. 고통을 느낄 수 없었기에 탄야는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돌볼 수 없었다. 폴 브랜드 교수는 말했다. “나병, 당뇨병, 알코올중독, 다발성 경화증, 신경 장애, 척수 손상 등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위험한 상태가 될 수 있다. 이들은 고통을 느낄 수 없어서 위험 속에 살고 있다” 고통은 우릴 아프게도 하지만, 고통 덕분에 우리는 귀한 생명을 지킬 수 있다. 고통은 우리가 세상을 안심하고 살 수 있게 지켜주는 안전망이다. 우리는 기뻐서도 감사하지만, 고통스러워서도 감사할 수 있다.
“아야! 아파!” 고통이 느끼는 순간 외치는 말이다. 이런 외침과 함께 우리가 마음으로 하는 다짐은 이렇다. ‘이건 아픈 거구나. 조심해야지’ 하지만 모든 고통을 조심하거나 피할 수만은 없다. 받아들여야 할 고통도 있다. 예들 들어, 어머니가 소중한 아이를 출산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때는 고통임을 알고도 피하지 않는다. 고통이 주는 귀한 의미, 예쁜 아가와 마주할 순간이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함을 알기에 고통을 견딘다. 인생에서 고통은 피해가야 할 장애도 저주도 아니다. 고통은 우릴 안전하게 살게 하는 감각이고, 성숙한 사람이 되게 하는 감정이다.
마음으로 겪는 고통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을 홀로 견디려 하니, 더욱 힘겨울 수 있다.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실패했을 때 인생이 끝난 기분이 든다. 삶이 계획과는 반대로 흘러가고, 기쁨과 희망이 없다고 느껴지면 고통은 몇 배로 크게 다가온다. 가장 소중한 사람, 소중한 어떤 것을 잃었을 때 느끼는 슬픔 역시 우리는 고통스럽다. 매 순간 다가오는 고통은 우리 인생에 아무 의미가 없을까? 아무것도 모르고 한없이 아파한다면, 다음 순간 찾아올 고통은 더 큰 두려움과 함께 온다. 대신 고통이 찾아온 이유를 알고, 마음에 새기면 다음번 고통은 두렵지 않다. 고통과 손잡고 선 기쁨도 발견하기 때문이다.
가장 힘든 고통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사는 한 사람이 있다. 작가이자 강사로 활동하며, 장애인을 돕는 비영리단체 「조니와 친구들 국제 장애인 센터」의 설립자, ‘조니 에릭슨 타다’다. 조니 에릭슨 타다는 현재 구필 화가로도 활동 중이다. 이유는 어깨 이하의 모든 신체를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969년 어느 여름, 밝고 쾌활한 스포츠 소녀 조니는 다이빙을 하다가 머리가 돌에 부딪혔고 척수를 다쳤다. 사고 이후로 50년 이상, 사지 마비로 휠체어에 의지해서 살지만, 조니 에릭슨 타다의 삶은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장애인을 돕는 단체를 설립해서 많은 장애인을 돕고 있으며, 강연과 책등을 통해서 세상에 희망을 전하고 있다.
조니 에릭슨 타다의 저서 『희망 노트』에 사지 마비로 살아가는 그녀의 삶이 담겨있다. 감동과 웃음으로 보았던 일화 하나가 있다. 조니의 친구 카렌이 비행기를 타고 그녀를 방문했고, 두 사람이 레스토랑에서 즐거운 식사를 나눈 일화다. 이 일화가 특별한 이유는 카렌이 거의 시각장애인이었고, 조니는 팔다리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카렌, 내 가방에서 특수 숟가락을 꺼내서 팔 부목의 소매 부분에 끼워줘요. 내 물컵은 당신 쪽으로 두세요. 내 입에 대줄 수 있게요” 카렌이 양손으로 물컵을 찾아서 빨대를 대고 조니의 입에 대주는 동안 이들을 불안한 듯 쳐다보는 손님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식사는 즐겁고도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식사하는 동안 카렌이 말했다. “지금 시각장애인이 사지 마비 환자를 인도하는 거죠?” 이 말에 조니가 대꾸했다. “아니요. 사지 마비 환자가 시각장애인을 인도하고 있어요. 내가 당신 접시가 어디 있는지 말해주고 있잖아요”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깔깔 웃고 식사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뜨거운 감동이 밀려왔다. 불편하고 고통스러울 법한 삶을 이토록 기쁜 마음으로 사는 조니와 카렌의 모습이 아름다워서다. 18세 소녀 조니가 평생을 사지 마비로 산다는 건 끔찍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수없이 좌절하고 원망하고, 회복되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을까. 차츰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면서 조니의 삶은 달라졌다. 조니의 고통은 많은 사람에게 큰 희망을 전하는 기쁨이 되었기 때문이다.
옛날 우리나라 학자들이 유배를 떠났을 때, 고통스러운 순간마다 읽고서 견뎌낸 글귀가 있다. 맹자의 고자장(告子章)에 쓰인 글이다. “하늘은 큰일을 맡기기 전에 마음을 괴롭게 하고 몸을 힘들게 하며 배를 곯게 하고 모든 일을 어지럽게 한다. 이 모든 것이 마음의 근육을 더욱 든든하게 만들고 버틸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이전에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만든다” 고통의 이유를 찾으면, 힘겨운 고통은 의미 있는 경험이 되고 소중한 삶이 된다. 우리에겐 고통을 기쁨으로 만드는 마음 능력이 있다. 이 마음 능력이 더 잘 발휘될 수 있게 돕는 작고 특별한 방법을 소개한다.
마음 능력이 더 잘 발휘되는 방법은 바로 걷기다. 운동 삼아 걷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일명 ‘세로토닌 워킹’이다. 걷는 동안 뇌에서 분비되는 신경호르몬이 있다. 행복 호르몬으로 알려진 세로토닌이다. 세로토닌이 분비될 때 느끼는 행복이란 극도의 흥분이나 쾌감이 아니다. 평온하고 온화한 행복, 맑은 숲속에 있을 때 느끼는 고요하고 잔잔한 행복이다. ‘세로토닌 워킹’이란 걷는 동안 더 많은 세로토닌이 분비되도록 돕는 워킹을 말한다. 세로토닌이 충분한 사람은 밝고 창의적이며, 실패와 좌절에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고통을 자신의 성장 무기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세로토닌이 풍부한 사람은 위기 속에서 기회를 본다.
세로토닌은 감정통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람 감정은 시소와 같다. 한쪽 끝이 극도의 기쁨과 쾌락이면 다른 쪽 끝은 긴장, 불안, 스트레스다. 세로토닌은 감정 시소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아준다. 만약 세로토닌이 부족해서 감정이 어느 한쪽 끝으로 치우칠 때, 우리는 우울감, 불안, 스트레스, 중독, 폭력 등의 성향을 띄게 된다. 세로토닌은 감정 시소가 평형을 이루게 도와주는 감정 중재자 역할을 한다. 우울할 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잠시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이유는 걸을 때 분비되는 세로토닌 덕분이다. 세로토닌을 더 많이 분비시키는 ‘세로토닌 워킹’, 어떻게 걷는 걸까?
첫째, 목표를 상상하며 걷는다. 세로토닌이 풍부한 사람은 분명한 목표를 가지지만, 반대로 분명한 목표를 상상해도 세로토닌이 풍부해진다. 확실한 목표가 있는 사람은 갈등, 스트레스, 고통으로 뒤엉킨 상황을 지혜롭게 풀어나갈 수 있다. 정확한 목표는 ‘결국 이룬다’라는 강력한 믿음과 확신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믿음과 확신은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마법의 에너지다. 분명한 목표를 떠올릴 때 느끼는 잔잔한 감동은 뇌에서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 시킨다. 목표를 자주 되뇔수록 뇌 신경회로는 목표를 이루는 뇌로 변하고, 목표를 이룰 수 있는 해답을 찾아 나선다.
명확한 목표를 본 사람에게 고통은 장애가 아니다. 고통은 삶의 과정일 뿐이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이런 말을 했다. “목표에서 눈을 뗐을 때 보이는 무서운 것이 있다. 바로 당신을 가로막은 장애물이다” 고통스러울수록 우리가 봐야 할 것은 고통이 아닌 목표다. ‘세로토닌 워킹’을 하는 동안 목표를 상상하자. 목표를 이뤄나가는 자신을 그리고, 눈부실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짓는 자신을 떠올리자. 우리 뇌는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무조건 많이 경험한 것을 현실로 만든다. 목표를 이루는 자신, 당당히 웃는 자신을 상상하며 걷는 동안, 고통을 삶의 일부로 인정하고 미소짓는 자신을 실제 발견하게 된다.
둘째, 기도하며 걷는다. 세로토닌 워킹에서 기도는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다. 나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며 걷는 걸 말한다. 우리는 기도를 할 때 기도하는 대상을 마음으로 묵상한다. 자신의 괴로움 때문에 기도하면 마음은 자신의 처절한 고통을 묵상한다. 이 때문에 기도가 끝나면 더욱 절망스럽다. 우리 마음을 평안함으로 이끄는 기도란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을 위한 기도다. 함께 사는 이 땅에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 잠깐 걸을 수 있는 귀한 순간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떠올리며 기도할 때 우리 마음에 따뜻한 사랑이 자란다.
예를 들어, 동부아프리카에 극심한 가뭄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한 기도. 추울 겨울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입을 것, 먹을 것 없이 고통받는 사람을 위한 기도. 무자비한 총질에 힘없이 죽어간 안타까운 가족을 위한 기도. 같은 하늘 아래 살지만, 우리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그들이 단 하루라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동안 우리의 고통은 어느새 사랑이 되어있다. 잠깐의 기도 동안, 우리는 마음으로 남의 고통을 보고, 남의 고통을 느낀다. 다른 사람의 평안을 비는 순수한 사랑은 그들뿐 아니라, 자신을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남을 위해 기도할수록 우리 마음은 더욱 평안해진다.
고통은 영어로 ‘pain’이다. 고통이 삶의 일부인 이유는 우리가 성장하는 중간중간에는 늘 고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성장통’이라고 말한다. 영어 표현은 ‘growing pains’다. 지금 삶이 고통스럽다면 이제 슬슬 성장을 준비하라는 신호다. 고통스러운 삶을 지혜롭게 잘 살아 냈다면 한 단계 성장한 것에 대한 기쁨과 만족을 선물로 받는다. 고통과 성장을 숱하게 반복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모난 것이 깎이고 다듬어진다. 숱한 고통과 성장 끝에 우리가 받게 될 최고의 선물은 진정한 인간다움, 즉 성숙한 우리 모습이다. 우리 인생은 이렇게 완성되어 간다. 고통은 우릴 인간답게 만드는 축복이다. 기쁨과 함께 선 고통을 웃으며 맞이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