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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 Oct 23. 2021

아직은 좋을 때다

유치원

 아따맘마는 실은 슬픈 만화이다


 유치원생 이주현의 일과는 이러했다. 유치원- 부개동 할머니 집- 우리 집.


 유치원 다음으로 시간을 많이 보낸 곳은 부개동 할머니 집이다. 유치원생에게 할머니 집은 너무 무료한 곳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나이 차를 극복할 수 없었다. 나는 짱구 이야기를 해도 웃을 수 있을 정도의 나이 차이가 덜 나는 사람과 놀고 싶었다. 그렇다고 동생이 좋았던 건 아니다. 동생과 매일 TV 채널을 가지고 경쟁했기 때문이다. 나는 짱구를 좋아하고 동생은 도라에몽을 좋아했다. 투니버스와 챔프의 싸움이었다.


 엄마가 회식하는 날에는 싸우지 않고 두 만화를 다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짱구, 도라에몽까지 다 보고 볼 게 없어서 그 당시에는 늦게 방영했던 아따맘마를 보았다. 아따맘마까지 보면 TV에 질리는 지경에 이른다. 아따맘마를 보는 것 자체가 묘하게 슬프면서 짜증까지 났다. 그렇게 우리는 1분에 한 번씩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엄마 빨리 와!” “엄마 제발 빨리 와.” 할머니 집이 지겨워져 집에 가고 싶어서 거의 화가 난다. 엄마는 발을 동동 구르며 전화를 받는다.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보며 회식자리를 빠져나와 우리를 데리러 온다.

     

 나는 엄마가 너무 미웠다.


 찡그린 졸업사진


 나와 내 동생은 엄마를 자주 놀린다. “어떻게 어린애들한테 신라면을 먹여?” 우리 엄마를 놀리는 단골 멘트이다. 나와 동생이 모두 어렸을 적에 엄마는 주말 아침마다 라면을 끓여줬다. 어떤 엄마는 MSG가 몸에 안 좋다고 라면도 못 먹게 하는데 참 터프한 엄마다.


 번개맨이 끝나도 엄마는 깰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빠는 보험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던 때라 주말에도 출근을 했다. 참지 못해 우리가 엄마를 깨우면 엄마는 비몽사몽 나와서 라면을 끓여줬다. 세 모녀는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맛있게 라면을 먹는다.


 지금은 토요일의 늦잠이 고단했던 평일을 보상받는 시간이라는 걸 안다. 우리는 살고 있던 곳과 조금 먼 ‘부개동’ 할머니 집 (우리 집에는 친할머니, 외할머니라는 호칭이 없다) 근처에 있는 대동 유치원에 다녔다. 유치원마저 종일반에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한 엄마의 결정이었다. 아침마다 전쟁이었다. 연두반 (나), 빨강반 (동생) 아이들을 모두 준비시키고 유치원 등원 시간 안에 차로 데려다줘야 했다. 장롱면허였던 엄마는 하얀색 중고차 하나를 뽑았다. 우리는 그 중고차를 똥차라고 불렀다. 엄마는 운전 중에 덩치가 큰 트럭이나 버스를 무서워했다. 나와 동생은 차 뒷좌석에 앉아 "버쯔 저리 가! 트럭 저리 가!" 등의 작은 응원을 해주기도 했다. 엄마는 그렇게 매일 도로에서 전쟁을 벌였다.


 대동 유치원을 다닐 때에는 청색 멜빵 치마를 즐겨 입었다. 하루는 청색 멜빵 치마를 입고 갔는데 연두반 선생님도 청색 멜빵 치마를 입고 오셨다. 연두반 선생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주현이 선생님이랑 같은 옷 입고 왔네!" 그 한마디는 6살 어린이를 기쁘게 하기 충분했다. 15명의 어린이 가운데 나만 사랑받고 있는 기분이랄까? 어렸을 때부터 약간 관종이었던 것 같다.


 하루하루가 고된 워킹맘이었던 엄마는 교육에서나 생활에서나 우리를 섬세하게 보살필 겨를이 없었다. 유치원 졸업사진을 찍는 날이었다. 연두반 선생님은 꼭 교복을 입혀달라고 학부모에게 당부했다. 엄마는 정신없어서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여느 때와 같이 내가 옷을 골라 입었다. 졸업사진을 찍는 날, 선생님과의 커플룩을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청색 멜빵 치마를 입고 갔다.


 연두반 선생님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선생님의 표정을 보고 살짝 당황했다. 연두반 선생님은 당장 나를 한 학년 낮은 반으로 데려가 한 아이와 옷을 바꿔 입게 하셨다. 고작 한 학년 차이라지만 아동기의 신체 발달은 급격했다. 나는 서럽게 작은 교복을 꾸역꾸역 입으며 사진 찍을 준비를 했다. 우리 집에 남아있는 연두반 졸업 사진 속의 나는 인상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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