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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 Oct 23. 2021

사교육의 기억

초등학교 1학년- 6학년

 애증의 피아노 학원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주현은 슬기롭고 즐거운 생활을 즐긴다. 하교 후면 2시쯤이었다. 할머니 집으로 달려가 할머니에게 500원을 달라고 한다. 할머니는 동전을 모아놓은 종이컵에서 500원 동전 하나를 꺼내서 나에게 건네주신다. 곧바로 친구와 떡꼬치를 사 먹는다. 내가 다니던 피아노 학원 1층에 있었던 떡꼬치 집은 8살 인생에서 가장 황홀한 맛을 선사해줬다. 떡에 발라먹을 수 있는 소스가 10개는 넘었다. 배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것처럼 매일매일 신중하게 소스를 골라 떡꼬치를 먹었다.


 떡꼬치를 다 먹으면 건물 바로 위에 있었던 피아노 학원으로 간다. 내가 유일하게 다니던 학원이었다. 학원에 가면 피아노를 쳤다. 알다시피 포도알이나 사과알에 연습한 만큼 색칠해야 됐다. 피아노 치는 게 즐겁지는 않았지만 싫지도 않았다. 가끔은 연습 한 번에 포도알 두 알을 칠해가며 5년이나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그럼에도 나는 개나 소나 나가보라고 권유받는 피아노 콩쿠르를 나가보란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때도 혼자 약간의 자괴감을 느꼈다.


 피아노 선생님이 나에게만 케이팝 피아노 악보를 주지 않고 클래식을 치게 한 것을 제외하면 피아노 학원에 애정이 많이 있었다. 할머니한테 돈을 달라고 해서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사 가 피아노 학원 친구들과 나눠먹곤 했다. 그랬던 나는 피아노 학원에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어느 날 나는 피아노 학원에서 곰돌이 필통을 잃어버렸다. 선생님한테 곰돌이 필통의 행방을 애타게 물었지만 모른다고 하셨다. 어쩔 수 없이 다른 필통을 마련했다. 며칠 뒤, 학원에 갔는데 내 필통이 책상에서 공유 필통으로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필통 안에 있었던 펜들도 친구들이 가져가서 막 썼다. 그렇게 5년을 다녔던 학원을 그만두었다.


 서강대가 뭔데?


 누군가가 잘하는 걸 꼽아보라고 하면 영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널려서 부끄럽지만 그래도 꾸준하게 해온 건 영어밖에 없다. 우리 엄마는 내가 잘하는 것을 영어라고 대답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주현이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이주현은 피아노 학원만 다니면서 친구들과 방탕한 놀이터 생활을 했다. 수학 부진아였지만 엄마는 특별히 수학학원을 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나에게 영어학원에 등록하자고 했다.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실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영어 학원에 등록하게 된다.


 나는 SLP 영어학원에 다녔다. SLP는 서강대학교가 만든 영어학원이다. 당시에 나는 SLP라는 로고가 박힌 가방을 메고 다녔는데 엄마한테 서강대학교가 뭐냐고 물어봤다. 엄마는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교라고 말했다. 나는 말했다. “우리나라에 대학은 1개 아니야? 서울대학교?” 어린 주현아 입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처음 영어학원에 갔을 때는 낯선 기류에 질식할 것 같았다. 영화에서만 봤던 외국인을 가까이서 보는 게 처음이었다. 파란 눈의 창백한 얼굴색을 가진 키 큰 원어민 선생님이 나를 가르쳤다. 놀랍게도 내가 반에서 연장자였다.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또 내가 영어학원에 다니는 게 신기한 게 아니라 심지어 조금 늦은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 때문에 영어 숙제를 꼬박꼬박 다 해갔다. 처음에는 해야 되니까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정말 영어를 좋아하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외모지상주의와 문화사대주의가 있었는지 원어민 선생님을 보는 것도 좋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순수하게 학문에 대한 열정을 가졌던 시기이다.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실은 순서가 반대이다. 즐기니까 잘하게 되는 게 아니라, 잘하게 돼서 즐기는 것이다. 영어를 잘하게 돼서 영어가 좋았다. 학원에서 열리는 글쓰기 대회나 영어 단어 대회 등에서 1등을 하면서 나의 어깨는 점점 올라갔다.     


 인천에서 빛을 내는 것을 보니 엄마는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더 높았던 부천으로 학원을 옮기게 했다. 다음은 청담어학원이었다. 청담어학원에서도 영어를 잘했다. 레벨 테스트를 토플 주니어로 봤는데 거의 만점에 가까운 성적이 나왔고 또 글쓰기를 잘해서 글쓰기 대회에도 나갔다. 지금은 수능 영어 한정으로 독해만 잘하는데 당시에는 입이 트여 영어 회화도 술술 했다. 이주현은 우물 안에서 경쟁한다는 사실을 몰랐고 자기가 정말 전 세계에서 영어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엄마는 딸을 위해 월급에서 조금씩 떼어 돈을 모았다. 우리 집은 당시에도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학교에서 영어시험을 잘 보는 것 이상으로 딸의 활동무대를 넓혀주고 싶었다. 꼭 한국에서 무언가를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항상 내게 말했다. 엄마는 학원만 등록해준 게 아니다. 내게 한국 외의 무대를 더 주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준 것이다. 엄마는 나에게 정말 가치 있는 것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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