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편
RMIT 대학을 지나가다가 갤러리에 우연히 가게 되었다. 입구에서 보라색 머리를 가진 여자분이 나를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셨다.
다양한 작품 중에 마음에 박혔던 작품이 있다. 'She tells me'라는 제목을 가졌고, 엄마가 나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스토리텔링 형식의 작품이다. 터키에서 온 이민자였던 엄마가 딸에게 해준 이야기를 풀어냈다. 엄마와 딸이 가진 그 자체의 관계성과 더불어, 어떤 나라 사람이던 공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작품이 정말 진실되게 다가왔다. 특히 우리 친할머니가 떠올랐다. 허리가 아프셔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젊으셨을 때 고생 많이 하셨죠?"라고 물어봤을 정도로 열심히 사셨다. 밭일부터 공장 일까지 이런저런 일들을 하셨다. 육 남매를 키우기 위해 전남 구례에서 서울로 상경해서 희생하신 할머니 생각이 나서 슬펐다.
마침 갤러리에 작품을 만든 분이 계셨다. 나를 들어오게 해 주신 보라색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내가 다가가서 우리 할머니에 대입하여 감상하니 슬프면서도 감동적이었다고 소감을 건넸다. 그러자 그녀는 말했다. "이 작품으로 네덜란드에서도 상을 탔어요. 이민자가 느끼는 감정을 이야기로 풀어냈는데 이 감정이 국적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을 관통하는 것 같아요."
그녀가 RMIT를 작년에 졸업했다고 하자 나이를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48살이라고 했다. 한국 사람들은 나이에 얽매여 많은 것들을 포기한다고 하자,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에 자신은 이 작품을 만들었다며 무엇이든 나이에 상관없이 도전하라고 했다. 그러고는 나를 안아줬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이상하게 히피가 되고 싶었다. (진짜 히피가 무슨 뜻인지는 뒤늦게 알아서 조금 실망했지만) 내가 정의하는 히피는 자유롭고 반사회적까지는 아니지만 반항적인 사람이다. 나와는 정반대이다. 정반대라서 갈망한다. 나는 멜버른에서 진짜 히피를 찾았다.
처음 묵었던 호스텔에서 같은 방을 썼던 중국인 언니와 친해져서 대화를 많이 했다. 이 언니는 중국에서 공부를 잘해서 명문대학교에서 예술이론을 전공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기가 원하는 건 손으로 직접 하는 예술이라고 깨닫고 멜버른에 유학을 왔다고 한다. 작품들도 상당히 독특하고 멋있었다. 또 하나 충격적이었던 건 중국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가진 것이었다. 어렸을 때 미국에서 홈스테이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 TV에서 티베트에서 승려들이 독립운동을 하는 장면을 보았다고 한다.
실은 한국에 있었을 때 나는 중국인에 대한 반감이 컸다. 인터넷 기사나 유튜브 댓글을 보면 우리나라의 반중정서를 볼 수 있다. 나도 그런 것들에 익숙해져 중국에 대한 적대감을 키워갔다. 하지만 그런 적대감은 다 직접 의사소통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막상 대면하면 극단적인 중화사상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따라서 사람을 출신국가로 평가하는 건 위험하다. 중국 사람은 이렇다, 일본 사람은 이렇다 등등. 나도 “한국 사람들 다 성형했으니 너도 했겠다.”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성형 안 함)
우리나라도 한민족 국가라는 점에서 내부에서 객관성을 잃기 쉽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하는 말들이 새롭거나 의외일 때도 많았다. 내가 만난 이 언니가 객관적 판단을 하게 됐듯이 나도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게 되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우물 안에서밖에 우물을 못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