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가는 관계를 마주한다는 것은

논터널링, 최의택

by 김수현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겠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너무 위험해. 안정을 유지해도 하루 이틀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데 이 꼴을 하고 대체 뭘 하겠다는 건데?"

"삶" (69)



오늘 소개드릴 책은 위픽 시리즈의 [논터널링]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는 '이드'라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이드'는 터널링의 존재로 저에너지 장벽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하죠.



다시 한번 터널링이란 무엇인가. 우선은 앞서 말했다시피 사람을 지칭하는 학술 용어의 하나이다. 하지만 엄밀히는 사람의 기본적인 특성, 예컨대 저에너지 장벽을 통과할 수 있는 능력 따위를 일컫는 말이었던 것이 시간이 지나 그대로 사람이라는 뜻의 일반명사처럼 굳어진 것이다. 그만큼 사람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터널링을 나는 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35-36)



이 책의 세상에서는 터널링이라는 존재가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세상입니다. 그에 반대되는 존재는 논터널링으로 저에너지 장벽을 통과할 수 없는 존재이죠. 논터널링, 터널링이라는 말이 어렵게 다가올 수 있지만, 쉽게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터널링의 존재는 자신이 있고자 마음먹은 곳에 있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동에 제약이 없으며 에너지 또한 음식물로 섭취할 필요가 없죠. 논터널링은 반대입니다. 음식을 통해 에너지를 섭취해야 하고, 이동을 위해서는 두 다리와 이동수단이 필요한 것이지요. 현대 사회의 인간과 같이 말입니다. 아무튼 책 속의 사회에는 터널링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논터널링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연구를 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하지요. '이드'는 논터널링이 다수를 차지했던 과거의 과학기술, 즉 고전과학에 대해서 연구를 하여 활용할 것이 있는지 발견하는 과학자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과학 실험을 하던 도중 실험의 오류로 인해 논터널링이 됩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존재가 논터널링이 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평소에 앓고 있던 병으로 인해 '이드'만 논터널링이 된 것이지요. 이드에게 일어난 변화는 '이드'가 함께 지내던 가장 친한 동료 '도이'와의 갈등, 그리고 '지그'라는 자신이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논터널링과의 만남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 집에서 하면 되잖아. 우리 집에서. 통원 치료받기도 좋고.
여기 모여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얼굴 맞대고 자학적인 농담 따먹기 해서 얻은 게 뭔데?
불행한 삶을 사는 게 나만이 아니라는 위로?
이더, 넌 치료를 받아야 해! 나아야 해! 돌아와야 한다고, 이전의 우리로"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화가 난다든가 서운하다든가 따위의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도이의 말과 행동이, 감정이 틀리지 않아서였다. 적어도 도이의 입장에서는 도이가 옳았다. 내가 마치 새로 태어나기라도 한 듯 철없이 들떠서 논터널링들과 웃고 떠드는 동안, 도이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그렇다고 근본적으로 달라져버린 내가 도이를 위한답시고 내|게 있어 이제는 옳지 않은 길을 계속해서 나아간다면 그것은 잘해봐야 우리 모두를 기만하는 행위에 불과할 터였다. (65-66)



이드를 아주 아꼈던 '도이'는 '이드'에게 치료를 하면서 자신의 곁에 있을 것을 권유했습니다.


또한, 지그가 정말로 해냈다는 사실도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는 논터널링으로서 논터널링만을 위한 삶의 터전을 설계하는 일에 모든 것을 내던졌다. 쉽지는 않았지만 끝끝내 작은 규모의 마을을 만드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57)



하지만 동시에 '이드'는 지그가 만든 논터널링만이 있는 세상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좋았죠.



'이드'의 정체성이 바뀌면서 마주하게 된 변화 앞에서 '도이'와의 갈등에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계란 무엇일까? 그리고 왜 관계의 변화 앞에서는 유난히 힘든 것일까?



관계에 대해서 네이버 사전에 검색을 해보니 가장 첫 번째 뜻으로 '둘 이상의 사람, 사물, 현상 따위가 서로 관련을 맺거나 관련이 있음. 또는 그런 관련. 남녀 관계.(출처, 네이버 국어사전)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제가 생각해도 관계라는 것은 서로 연관이 있다는 것인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관심 또는 마음을 상대에게 할애하고 있는 상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관계는 타인과의 연결이지만 지극히 자신의 관점에서 타인을 바라본 것과 타인의 반응 사이의 균형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관계가 변한다는 것은 자신이 타인을 바라본 관점의 변화로 인해 자신의 마음이 할애된 정도가 변화한다는 것, 혹은 타인의 반응으로 인해서 자신의 마음을 할애한 정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는 관계의 변화라고 하면 주로 전자의 경우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아주 쿨하게 넘어갈 수도 있죠. 그저 그런 인연이었다고 생각하고 돌아서는 둥, 혹은 진짜 별로였다고 잘했다며 쿨하게 돌아설 수도 있죠. 하지만 후자의 경우, 자신의 의도라기보다는 타인이 변화가 과분히 반영되어 그런 것인지 유난히 더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전 둘 다 마음이 편하지 않은 편이지만, 저는 후자가 조금 더 마음이 편한 편이긴 합니다..ㅎㅎ 슬픈고 힘든 것과는 별개로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러한 관계의 변화 앞에서 유난히 힘들어할까요?



저는 이 책에서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방에 대한 나만의 정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는 넌 그런 사람이었잖아. 그런데 넌 이제 그런 사람이 아니야.'라고 생각되는 마음에서 상대방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지요. 한 편으로는 정말 항상 나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 어느 순간 나를 떠난다고 한다면 어떠한 변화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상대와 함께 하는 것에 익숙해진 내가 상대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삶은 우리에게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던져주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 아닐까요. 나도 나의 삶 속에서, 너도 너의 삶 속에서.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또 새로운 것을 마주하는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에 '그래야 하는 것'을 설정하고 맞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한다면 우리는 변화 앞에서 더 많이 어색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과연 내가 생각하는 상대는 무엇인가,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세상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답은 없는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누군가가 그래야 하는 것은 없다고. 다양한 답이 다양한 형태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나도 이런 사람이었지만, 저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이런 생각은 나를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게 하고, 타인을, 세상을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나와 다른 너를 이해할 수 있게 하고, 나에게 의미를 내세우지 않게 됩니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일 수 있는 것이고, 삶에 의해서 나의 새로운 취향이 발견될 수, 새로운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수많은 변화를 우리는 매 순간 마주할 수 있기에 나의 주변에 지속되고 있는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느낄 수 있는 것이겠죠.



관계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은 동시에 지금 나에게 소중한 이 관계 또한 내가 모르는 어떤 일들에 의해 언젠가는 변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선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변화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언제 그러한 변화를 마주할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도 소중했던 관계가 언젠가는 서로 멀어지게 되고, 언젠가는 내가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 아닌 사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변화 앞에서 우리는 서로를 탓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저 우리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혹은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어떤 일에 의해서 서로 달라졌을 뿐이라 생각하고 그런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놓고 싶지 않은 관계가 분명 존재합니다. 저 또한 그런 변화 앞에서도 끄떡없었으면 하는 세상 무용한 바람을 가진 관계가 있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 앞에서 무용한 고민을 가지고 지금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그런 일 앞에서 변해갈 서로를 '그러한 모습도 있는 너'임을 받아들이겠다는 것. 그럼에도 내가 절대 용인할 수 없는 모습의, 나의 가치관과 충돌이 발생하는 모습의 너이기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라면 그때는 나의 최선이었음을 인정하고 돌아서기로. 그래서 지금의 우리 사이가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또 한 번 더 좋다고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리고 쓰면서 전 아주 사랑하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이상하게도 저는 늘 저의 마음이 변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더라고요. 삶이라는 것은 늘 저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그 앞에서 나는 과연 그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껏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애초에 시작하면 안 되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이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놓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 그렇게 변해버린 저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그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책 덕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우리는 모두 변하겠지요. 아무것도 남지 않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 사이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도 있고, 어쩌면 끝끝내 시간낭비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언제 올지도 모를 변화 앞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반쪽짜리 삶을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겠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너무 위험해. 안정을 유지해도 하루 이틀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데 이 꼴을 하고 대체 뭘 하겠다는 건데?"

"삶" (69)



이 사랑의 끝에는 무엇이 남을지, 어쩌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간들을 후회할까?' 가끔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다 보면 당당하게 '아니!'라고 외칠 수 있는 날도 '조금은 그럴 것 같아.'라고 생각되는 날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때로는 그 사랑이 저에게 미소와 행복을 주지만, 더 많은 날 절망과 불안을 선사하기도 하기에 무조건 적으로 사랑이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죠.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는 저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마주한 변화 앞에서는 조금은 찝찝하지만, 웃으면서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함께한 시간 동안 나의 최선이, 우리의 최선이 담긴 많은 이야기는 여전할 테니까요. 그리고 관계의 변화가 또 저를 어떤 새로운 사랑으로 대려다 줄지 모를 이야기이니까요.



아마,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을지라도, 사랑하지 않은 모습과는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 상대의 변화에 그리고 나의 변화에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어떤 것이 원래 그의 모습인지 잣대를 들이대지 말고, 그냥 '그'를 하나의 고유명사로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떤 말은 시대를 거듭하면서 의미를 조금씩 달리하기도 하니까요ㅎㅎ 내가 쓰는 나만의 '그'의 사전이 될지도 모르겠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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