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에게
내리비치는 햇살을 커튼이 반쯤 가린, 적막한 거실에서 커피를 내리고 식탁에 디저트를 놓고 의자에 앉아 얼마만에 불러보는 너인지. H,안녕.
잘 지내고 있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넌 기억나니.
갓 다섯살 된 우리는 동네 친구가 필요했던 너를 위해 너와 동갑인 아이가 있는 집을 어떻게 알게 된 너희 엄마가 너를 데려와 처음 만났지. 난 아직도 너를 처음 봤던 때가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 나.
푸근한 인상을 한 네엄마 치마 뒤에 숨어서 크고 쌍꺼풀 진 동그란 눈을 도로록 굴리던 너.
서로의 집과 동네 구멍가게를 지나 동네 놀이터랑 떡볶이 행상(노점)을 오가며 유치원까지.
진짜 단짝 친구를 생애 처음으로 경험하게 해준 너.
우리는 학교에 들어가서도 비눗방울을 불고 놀며 TV라디오 속에서 흘러나오는 서태지 노래를 듣고 매미채집을 하고 잠자리를 잡겠다고 나무에도 오르고 (나무 잘 타는 W랑 같이)또 학원에서 피아노를 치고 그렇게 미래에 대한 아무런 걱정없이 아무 그늘없고 해맑은 어린시절을 보냈어.
우리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넌 연락이 뜸해졌어.
난 가끔 너희 집에 찾아가서 겉보기에 별 다를 바 없었던 너와 시간을 보냈지만
넌, 나보다 훨씬 성숙했던 너는
이미 조금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었어.
힘겹고 현실적인 세상살이에 대해 나보다 좀 더 이르게 눈을 떴던 너는
우리는,
이제는 그때 당시의 부모님들보다 나이를 더 먹은 우리는
젊은 부모님들의 피땀과 눈물과 슬픔 한숨과 피곤함과 그 모든 수고들을 먹고 자란 까마득히 어렸던
기름묻은 손으로 너의 아빠가 건네주신 2천원으로 함께 자장면을 사먹고도 돈이 남았던 우리는,
이제 더이상 없었어.
우리가 함께하지 못한 만큼의 시간들이 너와 나에게 아마도 어떤 틈을 만들었고
내가 모르는 시간들을 지나온 너와 네가 모르는 시간들을 지나왔을 나는.
밤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한다던 너의 친구들과 함께 만났던 그 밤에, 너보다 훨씬 어리버리하고 뭘 몰랐던 나였을지라도
마음속으로 인정했던 것 같아.
너의 눈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고
우리는 함께 가고 있었던 이 길에서 머지않아 다른 길로 가게 되리라는 것을.
아주 나중에 전해들은 너에 대한 이야기는
한심하고 별 쓸모없는 나와는 달리 단단해진 너는
나와 다른 바다와 하늘을 저 너머 머리 위로 두고
아침에 커피를 내리고 출근을 하고 바쁜 하루 사이사이에 창밖 하늘을 쳐다보거나 혹은 작은 화단에 물을 주거나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다니는 거리를 너도 바쁘게 걷고 있을까.
너와 나는 그렇게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그렇지만 아마도 나는 너와 별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어.
햇살이 축복처럼 내리고 나뭇잎이 초록초록한
창밖은 여름인 이 계절에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