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생각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말과 생각의 힘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도 하고, 어렵게 하기도 한다. 말은 마음의 표현이며, 생각의 산물이다.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창의적인 생각은 우리의 삶을 지혜롭게 이끌어 준다. 그러나 인간 관계에 얽힌 일이나 지나간 일, 다가올 일에 대한 지나친 생각이나 걱정, 근심은 우리의 마음을 괴롭힌다.
나이가 들수록 생각이 많아진다. 바람직한 생각보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대부분이다. 쓸데없는 생각을 한자 말로 ‘잡념’이라고 한다. 잡념은 풀밭에 나는 잡초와 같아서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푸른 풀밭을 가꾸기 위해서는 잡초를 뽑아야 하고, 주위의 못 쓰는 썩은 나무 가지 등도 치워야 한다.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잡념을 뽑아내거나 내버려야 한다. 그러나 잡념은 잡초와 달라서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이 놀라서 뛰어갈 때 "엄마"를 외친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이럴 수가!" "아이고!" 등의 말이 절로 나온다. 우리의 주변에는 저절로 나오는 말의 소리가 있다. 영어권에서는 "Oh my God"이라는 표현이 있으며, 하늘을 나는 철새들은 떼를 지어 이동할 때 울음 소리를 높인다. 또한 운동 선수들은 힘을 내기 위해 구호를 외치고, 관중들은 소리 높여 응원한다. 마법사는 마법의 묘기를 보이기 위해 주문을 요구하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지만, 말의 소리에는 분명한 힘이 있다.
잡념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사탄과도 같다. 잡념의 사탄은 물리치지 않으면 점점 커지고 그 기세를 높인다. 잡념의 사탄은 쉽고 단순한 말의 소리를 겁내고 무서워한다. 우리의 주변에는 이러한 말의 소리가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불가에서는 '무', '공', 요가에서는 '옴' 등을 사용한다. 이러한 말의 소리 중 자신에게 적합한 말을 찾아 반복하여 외우고 잡념을 내보내는 연습을 계속할 때, 우리는 떠오르는 쓸데없는 잡념이 우리의 마음 속에 설 자리가 없도록 쫓아낼 수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두려움이 많았다. 높은 곳도 두려웠고, 어두운 곳도 두려워서, 두렵고 무서운 곳은 피해가며 살아왔다. 또한, 어릴 때 동네에서 무당이 춤추며 굿하는 장면도 피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굿하는 장소는 피해갔지만, 굿하는 소리는 귀에 남았고,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소리는 장구 소리와 함께 섞여 있던 무당의 "~야 물러가라"였던 것 같다.
커서 성경을 대하면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실 때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구절을 접하게 되었다. 그때 어렸을 때 들었던 무당의 소리가 떠올랐다. 또한, 연속 사극을 보면서 임금님이 신하를 준엄하게 꾸짖을 때 "물러가라"는 대목도 귀에 들어왔다.
고희를 넘으면서 "물러가라"는 말이 다시 귀에 들어오면서, 이 말에 어떤 알지 못하는 힘이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 주위에는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의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그 요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고통이 "물러가라"는 깊은 마음의 소리로 우리의 마음 속에 울려 퍼질 때 우리의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마음이 심란하면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고, 생각들은 서로 연결되어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생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힘이 있으며, 지치지도 않고, 마음을 휘저으며 이리저리 움직인다. 좋은 일이 떠오르면 기분이 좋아지고, 나쁜 일이 떠오르면 화가 난다.
그러다 보면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잡다한 생각들은 실체가 없는 허상일 뿐이다. 허상들은 뿌리가 없어서 어느 순간 사라지기도 하지만, 어떤 생각들은 우리의 마음 속에 깊은 상처를 남기며 끊임없이 괴롭힐 수 있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는 말은 '더위를 더위로 이긴다'는 뜻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을 생각으로 이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생각을 호흡에만 완전히 집중할 때, 그 속에서 나오는 생각의 힘은 허상들의 생각을 물리치고 우리의 마음을 지켜줄 수 있다.
나무에는 결이 있고, 행성들은 태양 주위를 돌며 궤도를 이루고, 전자는 원자 주위를 회전한다. 이는 우주의 구성이 중심과 그 주위를 도는 궤도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 역시 마음과 생각의 원점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각기 고유한 상태의 궤도를 이룬다. 편안한 상태, 힘든 상태, 스트레스로 지친 마음의 상태, 고요한 마음의 상태, 무언가를 열심히 찾으려는 생각의 상태, 마음을 비우려는 생각의 상태 등의 궤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은 한 상태의 궤도에 계속 머무르기보다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끊임없이 이동한다고 볼 수 있다.
갈릴레오 피사의 사탑이야기는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기울어진 탑으로 이름난 피사의 사탑(斜塔)은 이탈리아 피사에 있는 성당의 종루(鐘樓)이며 관광 명소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오가 물체가 자유 낙하하는 시간이 물체의 질량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서 크고 작은 두 종류의 물체를 동시에 떨어뜨려 양쪽이 동시에 땅에 닿는다는 것을 실험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일화는 갈릴레오의 제자였던 비비아니(Viviani)가 생각으로 한 사고(思考) 실험이며, 실제 실험은 1586년 네덜란드의 물리학자인 스티븐(Simon Stevin)이 행하였다고 한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는 기원전 400년전 하나의 물체를 반으로 계속 쪼개어 나갈 때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마지막에 남는 입자를 원자 (그리스어 a-tomos, 더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 'in-divisible')로 이름하였고, 20세기 물리학자 러더포드(Ernest Rutherford)와 보아(Niels Bohr)가 이를 증명하였다. 러더포드와 보아는 원자의 모형을 태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태양계(solar system)와 같이 원자핵의 주위를 회전하는 전자들의 집합체로 묘사하고 이를 실험실에서 증명하였다.
숫자 '0'을 영(零, zero) 또는 공(空)이라고 한다. 이 공(空)의 숫자는 우리 생활에 편리함을 주는 10진법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곱셈에서는 누구도 당할 수 없는 강한 힘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큰 숫자라도 공(空)을 곱하면 0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재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가진 돈에 공(空)을 곱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공(空)은 나눗셈에서도 마찬가지 힘을 발휘한다. 아무리 큰 숫자나 작은 숫자라도 공(空)으로 나누면 '무한대'가 된다. 덧셈이나 뺄셈에서는 어느 숫자에서 공(空)을 더하거나 빼도 본래의 숫자는 변하지 않는 무(無)의 힘을 가진다.
이러한 공(空)은 근심도 잡념도 아무것도 없는 고요한 빈 마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잡념에 마치 '0'을 곱한 듯이 이루어진 공(空)의 빈 마음 안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마치 '0'으로 나누기라도 한 듯이 무한한 사랑과 기쁨을 느끼게 한다.
또한 숫자 '0'의 테두리를 계속 작게 줄여간다면 아주 작은 한 점이 되며, 이와는 반대로 그 테두리를 자꾸 크게 늘려간다면 끝없이 큰 우주까지도 포함할 수 있는 무한한 공간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숫자 '0'은 한없이 작은 한 점과 끝없이 큰 우주의 속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이다. 이 말은 생각이 없으면 내가 존재하지만, 나를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나 자신'을 자아(自我)라고 한다. 어린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더라도, 성인이 된 어른과 어린아이는 시간이 다를 뿐 동일한 ‘나’이다. 마찬가지로, 나이가 들어 기억을 상실하더라도 기억을 상실한 사람과 기억을 상실하기 전의 사람은 동일한 ‘나’이다. 즉, ‘나’라는 자아에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의 레이어가 나무의 나이테처럼 층층이 입혀져 있을 뿐, ‘나’의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 이를 반대로 본다면, 자아에 입혀져 있는 생각을 하나씩 벗겨낼 때 ‘나’의 본질에는 변함이 없으며, 최종적으로 마지막에 남는 것이 ‘자아’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아’를 찾기 위해서는 입혀져 있는 생각을 모두 버려야 한다.
15~16세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문예부흥은 르네상스(Renaissance)로 불린다. 르네상스는 새로 태어난다는 의미를 가지며, 인간이 ‘신’ 중심의 중세 문화에서 벗어나 ‘자아’에 눈을 뜨고 이를 발견하려는 문화 운동으로, 문학, 건축, 조각, 예술, 음악 등을 통해 근대 문화의 기초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이름을 통해서 보는 자아의 정체성
정체성은 영어로 identity라고 한다. 정체성의 문제는 자아(自我)의 발견에 따라 현대인에게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내가 누구인가?"에 이어지는 질문은 "내 이름이 무엇인가?"이다. 이에 대해 우리의 선조들은 당신의 이름을 ‘나다’로 표현하였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름 속에 자신의 삶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여 이름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자손들의 이름을 지을 때는 집안의 가장 연장자가 그 책임을 맡았다. 또한, 조상들은 이름 외에도 자신을 칭할 때 호(號)를 사용하였고, 자손들에게는 자신을 ‘나다’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이름에 대한 문화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너무 거룩하게 여겨 직접 부르지 않고, 대신 ‘엘’, ‘엘로힘’, ‘아도나이’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계시할 때 “나는 있는 나다”라고 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받았다. 이는 출애굽기 3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문화의 영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은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말이다. 간단하고 쉬운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나는 확실히 옛 세대 사람인 것 같다. 사실 우리 이름의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성(姓)’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돌림자와 부르는 이름이 따른다. 결국, 세 글자 이름의 경우, 나의 자율적인 이름은 그중 한 글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름이 규격화되면서 윗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기에는 다소 불편함이 생기고, 족보를 따지는 사람들은 이름을 보고 그 사람의 배경이나 내력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신분화된 이름에 대해, 지혜로운 우리의 선조들은 상대방이 자신의 이름을 쉽게 부를 수 있도록 ‘호(號)’나 직함 등을 사용하였다. 또한, 예술과 글을 사랑하는 이들은 예명이나 필명을 가지기도 하여, 이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름은 태어나면서 부모님이나 가족에 의해 주어지고, 직함은 세월이 흐르면서 직업이나 역할에 따라 얻었다가 사라지곤 한다. 반면, ‘호(號)’는 본인이 선택할 수 있으며, 일종의 삶의 동반자로서 평생 함께한다. 옛 세대 사람들이 ‘호’를 지니며 멋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나만의 ‘호’를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기억을 통해서 보는 자아의 현재성
생각은 과거의 기억을 현재로 불러오기도 한다. 어릴 적에 들었던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설화이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처럼 오래된 설화뿐만 아니라, 어릴 때 부르던 동요, 부모님과의 기억들도 자리하고 있다. 특히 부모님과의 아름다운 기억들은 마치 부모님의 영혼이 내 마음속에 살아 있는 듯한 따뜻한 느낌을 준다.
한평생을 사시고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들을 우리는 "돌아가셨다"라고 표현한다. 조상의 혼을 중요시하는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는 이 표현이 영혼이 처음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처음 온 곳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의 영혼은 ‘나다’라는 자아의 이름을 지니고,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