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서는 살 수 없고, 가족과 함께, 그리고 사회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된다. 인간관계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삶에는 언제나 양면성이 존재하듯, 인간관계에서도 좋은 점과 어려운 점이 함께하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갈등의 씨앗으로 변질될 수 있다.
인간관계는 마치 꽃과 같다. 꽃을 가꾸는 마음이 좋은 인간관계의 열매를 맺게 하듯, 관계를 지속적으로 돌보고 가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꽃에 물을 주듯이, 행복한 삶으로 이끄는 좋은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명상이나 묵상 또는 기도를 통하여 마음을 가꾸고 덕(德)을 쌓는 수양이 필요하다.
우리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말이 있다. 살아가면서 이 속담이 너무도 적절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굳게 믿고 있던 사람이 갑작스러운 소식을 전할 때, 그 충격은 상상 이상이다. 그럴 때면 머리가 빙빙 돌고, 가슴은 두근거리고, 눈에서는 불이 나는 것 같고, 온몸의 피가 머리로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말문은 막히고, 마음은 혼란스러워서 감정이 쉽게 정리가 되지 않는다.
과학의 발전으로 이제는 천 길 깊은 물속까지도 모두 탐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사람 마음속은 여전히 미궁이다. 오히려 사람의 속마음을 샅샅이 알지 않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안에는 오랜 시간 쌓인 풀리지 않은 한과 미움의 찌꺼기들이 썩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을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때로는 모르는 채로 남겨두는 것이 서로에게 더 평온할 수도 있다.
한에 맺힌 미움의 찌꺼기들을 깨끗이 씻어내는 최고의 약은 바로 "용서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돈이 들지 않는 무료의 명약이지만, 그만큼 쓰기 때문에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더 쉬운, 입맛에 맞는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만, 진정 몸과 마음에 좋은 약은 쓰다는 속담처럼, "용서하는 마음"을 찾고 받아들이는 노력이 진정한 치유로 이어질 수 있다.
물은 위 쪽에서 아래 쪽으로 흐른다. 우리의 생활에서 필수 요소인 수돗물이나 하수물도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때 아니게 비가 많이 오거나, 배수에 문제가 있어서 물 흐름에 이상이 생기게 되면 물이 역류하게 된다. 이러한 역류 현상을 방지하기위해서 배수관등에는 체크 밸브를 설치한다. 체크 밸브는 물의 흐름을 한 방향으로만 흐르도록 간단한 구조로 설계된 장치이다.
우리의 삶에는 세월이 있고 세월의 흐름은 시간과 함께한다. 물과 같이 위쪽 아래쪽과 같은 방향성은 없지만, 시간은 분명 저 세상을 향하여 흘러가고 있으며, 이는 자연의 이치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의 흐름을 편의상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생각한다. 그런데 때때로 힘들었던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배수관으로 생생하게 역류되는 경우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시간의 역류가 심해지는 경우, 우리는 마음의 안정을 잃게 되고 심한 경우에는 마음의 병까지 유발하게 된다. 이외 같은 시간의 역류를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현재를 보호하고, 현재 안에서 지낼 수 있는 마음의 체크 밸브가 필요하다.
부딪쳤던 지나간 순간의 일이 너무 억울하거나 가슴 아팠다면, 그 기억은 과거를 넘어 현재와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기억은 '영원한 과거'가 되어 현재와 미래를 지배할 수 있다. 현대의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암을 예로 들면, 암이 더이상 퍼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암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상처의 기억이 더이상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현재와 미래를 과거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 과거의 상처가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마음의 치유를 통해 영원한 과거에서 벗어나야 한다.
영원한 과거
영어에서 어려운 문법 중 하나가 동사의 시제이다. 문장의 시제에 맞추어 동사를 과거형, 현재형, 미래형으로 바꾸어 사용해야 한다. 여기에 불규칙 동사까지 포함되면, 동사의 시제 변화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 있다. 반면, 우리말의 시제는 동사보다는 문장의 구성에 따라 나타난다. 예를 들어, 과거일 경우에는 "내가 그때는 ~", 현재일 경우에는 "내가 지금은 ~", 미래일 경우에는 "내가 앞으로는 ~" 등으로 표현한다.
한 번 일어난 좋고 나쁜 과거의 사건들은 기억에서 잘 없어지지 않는다. 지나간 사건들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특히 상처받은 기억은 생생할 정도로 되살아나게 된다. 과거의 기억이 과거의 사건을 생생한 현재로 탈바꿈시키는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영원한 과거" 또는 "과거의 노예"라고 부른다.
사실 상처받은 과거의 기억들을 잊어버리기는 쉽지 않다. 사건은 지나갔지만, 기억은 시간을 넘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억을 없애거나 잊으려는 노력보다는, 그 사건에 얽혀 있는 감정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감정이 붙어 있지 않는 기억은 사건 자체의 기억일 뿐, 우리를 스트레스로 유도하지는 못한다.
지나간 일
우리에게는 좋은 일, 나쁜 일, 슬픈 일, 기쁜 일 등 많은 일이 있다. 기쁘고 좋은 일들은 간직하고 싶고, 슬프고 나쁜 일들은 잊어버리고 싶다. 그런데 살다 보면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기쁘고 좋은 일에 대한 기억은 쉽게 사라지고, 슬프고 나쁜 일에 대한 기억은 우리의 주위를 쉽게 떠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것이 우리 기억의 속성일지도 모른다.
지난 일은 기억에서 점차 사라지고,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며, 지금 일에만 몰두하면서 자연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시간까지 되돌리며 살아가는 시대이다. 유튜브와 같은 영상 기술은 지난 일을 쉽게 현재처럼 만들어 줄 수 있다. 이러한 문명의 이기는 잊어버려야 할 기억들을 생생하게 되살릴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지난 일이 지금 일로 계속 남아 있으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지난 일은 과거로 돌려보내야 하며, 그래야만 현재에 충실할 수 있다. 현재에 충실할 때 우리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삶이 자연의 순리를 따르게 된다.
인간관계를 점수로 계산할 수는 없지만, 한번 생각해보려 한다. 이 세상에 백 퍼센트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불완전한 두 사람이 서로 인간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마치 자신이 완전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A와 B는 서로를 각각 백 점 만점으로 평가한다. 예를 들어, A가 B를 생각해보니 인상도 좋고, 말도 잘하며, 예의도 바르고, 신뢰할 만하며, 착한 것 같아 백 점을 주고, B도 A가 마음에 들어서 백 점을 줄 수 있다.
A와 B의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양방향 관계이다. 따라서 A와 B가 서로에게 주는 점수는 각각 반쪽에 해당한다. A 쪽의 반쪽 점수와 B 쪽의 반쪽 점수가 합쳐질 때 A와 B의 관계에 대한 완전한 점수가 된다. 그러나 A와 B 관계의 완전한 점수를 A나 B가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본인이 상대방에게 주는 점수도 완전하지 않은데, 상대방이 본인에게 주는 점수는 더욱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A와 B가 줄 수 있는 인간관계의 최고 점수는 각각 50점씩이다. 50점은 상대방이 완전한 사람이 아니지만 완전하다고 믿고 줄 수 있는 최고 점수이다. 사실 본인이 본인과 본인 간의 관계에 점수를 준다 하더라도 50점을 주기는 어려운 것이 인간이다.
세상 만사가 백 점이 만점이라지만, 인간관계는 양쪽을 합쳐서 백 점이다. 즉, 본인과 상대방 각각에게는 최고 점수가 50점이다. 즉, 내가 상대방을 믿고 줄 수 있는 최고 점수는 50점이며, 나머지 50점은 상대방이 나에게 줄 수 있는 최고 점수이다. 이것이 정확한 인간관계의 현실이다. 물론 부모 자식의 관계는 다를 수 있다. 한 지붕 아래서 사랑을 받고 자라는 자식이 부모와의 관계를 점수화해 본다면, 본인이 부모에게 주는 점수 50점에 부모가 본인에게 주는 점수 50점을 더하여 백 점이 될 수 있다.
“콩가루 집안”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가족 간의 불화로 인해 서로 뭉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생활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문제는 가족뿐 아니라 직장이나 공동체 등 모임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 인간 사회에서 불화 없는 역사는 없었기에, 우리가 혼자 살지 않는 한 불화는 우리와 함께한다고 보아야 한다. 문제는 불화가 계속해서 불화로 남아 끝내 해결되지 않는 경우이다. 그러나 불화가 화해로 이어져 화합을 이루면, 그 가족이나 직장, 공동체는 쉽게 깨어지지 않는 단단한 모임으로 승화될 수 있다.
우리가 실수를 범했을 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 실수를 교훈 삼아 조심한다면, 우리의 삶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는 마치 예수님의 사도들이 빈곤과 갈등이 있는 곳을 찾아 그리스도 정신을 전하며 이를 극복하려 했던 것과 같은 이치다. 즉, 진정한 문제는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화해의 정신을 실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을 비우지 않으면 이룰 수 없으며, 자신을 비우는 과정은 가시밭길과도 같다. 말이나 생각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마음을 갈고 닦는 정신 수양이 필요하다. 비워진 고요한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세상의 불화와 고난을 슬기롭게 이길 수 있다.
우리는 서로 소통하며 살아간다. 복잡한 생활 구조 속에서 소통 없이는 우리가 살아갈 수 없다. 그런데 소통을 하다 보면 소통하기 힘든 사람도 만나게 된다. 취미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할 말도 별로 없고…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과 소통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소통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소통을 위한 소통은 답답하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이러한 어려운 소통을 해야 하는지 고민할 때도 있다.
세계 인구는 약 80억 명이라고 한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얼굴 모습이나 성격이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각자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만의 유일한 모습과 성격, 생각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서로의 다름이 우리의 삶을 이루는 기본 원형인 듯하다.
우리의 삶에는 쉬운 길도 있고, 어렵고 험한 길도 있다. 쉬운 길만 따르는 소통은 뿌리가 약한 나무처럼 작은 바람에도 쓰러지기 쉽다. 반면, 어려운 길을 헤쳐 나간 소통은 뿌리 깊은 나무처럼 세찬 바람에도 견디며,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다.
생각이 같은 사람과의 소통은 즐겁고 부담이 없다. 반면,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소통은 우리의 마음을 어렵게 하지만, 소통의 깊이를 더해준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의 다름을 이해할 때 소통의 벽이 사라지고 원만한 소통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삶의 터전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물론, 인간관계 속에서 나오는 스트레스도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거나, 조용한 장소를 찾아가며 마음을 달래고 조용한 시간을 가지려 해도, 마음속에 자리잡은 스트레스를 피하기란 쉽지 않다.
스트레스는 외래어이다. 이와 비슷한 뜻을 가진 단어로는 압박이나 긴장 등이 있지만, 완벽하게 번역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스트레스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에 전해지기 이전에 살았던 조상들은 스트레스가 없이 살았을까? 아니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그것이 스트레스인 줄 모르고 살아갔을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스트레스라는 단어는 우리 마음에 쌓이는 문제를 설명해주는 단어일 뿐, 그 단어가 없었다고 해서 마음의 문제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스트레스와 연결된 마음의 문제는 수학 문제와는 달리 단 하나의 해답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수학 문제를 푸는 방법처럼 마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복잡한 수학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를 단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처럼, 마음의 문제도 비슷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 복잡하게 얽힌 실을 풀려면 실마리를 잡아야 한다. 실마리를 잡으면 얽힌 실이 술술 풀리는 것처럼, 마음의 문제도 억지로 해결하려 하면 더 꼬이게 된다.
그렇다면, 마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는 무엇일까?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그 얽힘을 서둘러 바로 풀려 하지 않고, 시간을 두고 조금씩 풀어가는 것이 더 나은 접근일 수 있다. 복잡하게 꼬인 문제를 억지로 풀려다 보면 상처의 기억이 더욱 강하게 각인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그 상처를 더 깊게 만들 수도 있다. 오히려 그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차분하게 천천히 풀어가는 방법이 마음의 치유에 더 효과적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