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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ghee May 24. 2024

키가 작아 유감이었다.

학기가 끝날 때쯤
여름방학 동안 학생아파트를 리노베이션 한다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바로 앞 동이라 멀지는 않았지만
3년을 산 곳이니 정도 들었고
무엇보다 이제 한 학기만 더 있으면 졸업이라 어차피 이사를 나가야 하는데 한번 더 하는 꼴이 되어 여간 성가스런 것이 아니었다.

파이널 중이라 좀 늦춰서 가고 싶었지만
시간도 촉박하고
이미 학기를 마친 남편은 여유도 있어서
나 수업 간 사이에 이웃 학생들 모아 이사를 하겠다고 해서
부탁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마누라의 부탁이나 말은 잔소리로 치부해 버리고 까맣게 잊어버리는 남편인 걸 그 순간 또 잊어버리고서..

내 방 클라짓은 건드리지 마라!
그건 내가 할 테니까!

클라짓 안에는  속옷들도 있고 그냥 주루룩 들고 옮길게 뻔하니 그러면 옷들 땅에 끌리고.. 세탁을 따로 해야 하니 걱정도 되고 해서였는데..

암튼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니
나의 당부는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처럼
어디론가 산산이 부서져 없어져 버리고
내 방 클라짓은 텅 비어 있었다.

으이구!

새 아파트로 들어오니 아니나 달라 옷을 땅에 끌은 게 분명한 듯 흙들도 묻어있어
나의 노기는 탱천 하다 못해 터져서 오랜만에?^^ 부부싸움을 한바탕 하고
그렇게 몇 날이 흘렀다.

파이널이 끝나고
여유 있게 쉬고자 침대에 누웠더니
창밖으로 이사 나온 아파트가 공사 중인 것이 보였다.

드디어 레노베이션을 시작했... 하다가 퍼뜩!
아..
내 돈!!!!
으아악!

하며 입은 옷 그대로 달려갔다.
입구에는 공사 중이라 위험하니 일반인 접근금지 종이가 붙어있었다.

다행히 공사장 일꾼 한 사람이 보여서 붙들고
며칠 전 이사했던 사람인데 집에 중요한 물건을 두고 나왔으니 잠깐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원을 했다.
매니저가 나와서 사정을 듣더니
빨리 갔다 오라고.







내 방 클라짓 선반에는 봉투에 넣은 현찰 4천 불이 있었다.
다른데 둘 곳도 없고 해서 그곳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놓았었다.

캠퍼스 선배이자 당시 간호사로 일하고 있던 M 언니가 어느 날
"영희야, 너는 몸도 연약하고 잘 아프고 병원도 자주 가니 은행에다가 돈 넣어 두지 마라. 미국 병원비 무시무시한 거 너 잘 알지?
병원비 나오면 니네 은행이나 집 할 거 없이 탈탈 털려 다 내야 해. 돈 없으면 deal 하면 되니까 병원 가는 건 걱정 말고!"

우리보다 미국생활 오래 했고 게다가 병원근무하는 언니라 그 말은 곧 진리였던 때였으니!

신께 순종하는 것보다 더 찰떡같이 순종하여
은행에 있던 마지막 학기 등록금과 생활비 4천 불을 찾아서 봉투에 넣어 놓았던 것이다.

지금 4천 불도 적은 돈이 아니지만,
30년 전
그것도 수입이 없는 유학생신분으로

그 돈으로 살림도 하고 나의 마지막 한학기 등록금도 내야했던
우리 집 전 재산이었다.

이미 공사를 시작했기에 바닥은 어지럽혀져 있었고 클라짓 앞엔 빈 봉투가 버려져 있었다.
나에겐 선반이 손을 들어 올려야 닿는 곳이지만 키가 큰 미국사람에겐 눈으로 보이는 위치라..키가 커서 횡재했을 그 누군가가 너무 미웠다.
살면서 이때처럼 키가 작아 유감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그때의 황망함은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머리가 하얘지는 이 경험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엄마의 부고에 또 한 번을 겪게 되었지만
이때가 처음이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찌어찌 돌아와 남편에게 말하고
우리 둘이는 천장이 뚫어져라 한숨을 쉬고 망연자실한 몇 날을 보냈다.

우리 집 생계가 달렸고 다음 학기 등록금이니 제발 돌려달라고 써서 아파트 입구에 붙여놓았지만 그건 그저 소낙비속에서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려는 희망 없는 마지막 노력에 불과했다.

엄마, 아빠의 이 모습에 아이들조차 풀이 죽어서 함께 기가 죽더니
첫째가 다음과 같이 선언을 했다.

엄마! 난 이제 하나님 같은 거 안 믿어! 우리 가족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하나님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어!

첫째의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당시 나는 마악 하나님을 믿어 신자가 되었고 아직 따뜻한 상태였기에
아이를 이렇게 만드는 건 분명 잘못이라 여기고

아니야 , 이건 하나님 잘못이 아니라 엄마가 잘못한 거야! 엄마가 잘못했어. 우리 안 죽으니까 걱정 마!

하며 아이를 안심시켰지만 사실 대책은 없었다.
당장 은행 계좌엔 200불 정도만 있었고 아파트 렌트비, 식비, 학비.. 를 대체 무엇으로...

한국에 있던 돈도 다 떨어져서
더 이상 가져 올 돈도 없었기에.

우리 집 사정은 첫째가 친구에게 말한 것으로 시작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진 모양이었다.

당시 남편이 일하던 beauty supply 가게 여주인이자 미국에서 처음 사귄 친구 Y가 갑자기 집을 방문했다.  
그녀의 손엔 3천 불이 든 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영수엄마! 일단 받고 급한 대로 써요. 공짜로 주는 거 아니고 빌려주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아요!
영수네는 한국 돌아가면 휴직하고 온 직장 있으니 이 정도는 금방 갚을 수 있을 테니 나도 믿고 빌려주는 거예요!

사람 사는 게 그렇다.
한순간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잔뜩 구름이 껴서 컴컴하던 세상이 갑자기 환히 밝아졌다.
그녀가 그렇게 구세주가 되어주어서
기죽었던 아이들도 다시 팔짝팔짝 뛰기 시작하고 멈춘듯해 보였던 내 심장도 다시 정상을 회복했고 다시 먹거리를 사러 시장을 갈 수 있었다.

인생은 막다른 골목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아니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다라고 하던가?

기막힌 반전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귀국 후 돌려달라던 그 돈은 불과 몇 달 뒤에 갚을 수 있었다.

잃어버렸던 돈이 돌아왔을까?
아니다.


일단 우리 가족이 절망중에 다시 일어설  있도록 손 잡아 일으켜 주었던 Y!

시상식은 아니지만 그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물론 그때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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