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자라면서 익숙해진 자연환경, 문화를 벗어나 산다는 건 날마다가 총성 가득한 전쟁터에서 사는 것과 방불하다고말하여지곤 한다.
게다가
미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광활한 대지와 다이나믹한 기후를 가지고 있는지 날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경험하며 살고 있다.
트위스터라는 영화를 보면서 세상에 저런 일도 있구나.. 했었다. 그리고 그 영화에서 토네이도..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고. 영화니까.. 무엇이든 자극적이고 과장되게 해서 관객에게 임팩트 있게 다가가야 하는 영화니까.. 하고 기억 저편으로 넘겨버린 일이었다.
교내 건물을 다니다 보면서 자주 마주치던 이런 싸인도 뭐 설마, 그러려니 했다.
남편이 학회를 가면 내 맘속에는 뭔가 모를 기쁨이 스멀스멀 솟아오른다. 아이들을 혼자 돌보아야 했지만 뭔가 가사노동에서 조금 해방되는 걸 느끼는 건 아주 이상한 건 아니다.
아이들은 좀 간단하게 먹여도 될 거 같고 빨랫감도 줄고.. 등등의 이유가 좀 치졸하게 보일진 몰라도 공부와 가사와 육아에 시달리던 때에, 게다가 당시엔 아무리 유학을 나와 공부를 한다고 해도 유교적 가부장제의 폐습을 그대로 가지고 살던 때니 남편은 함께 도와가며 가정을 꾸리는 존재가 아니라 이것저것 챙겨주어야 하는 존재였기에 그랬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무슨 조선시대 이야기냐? 할 테지만 불과 30년 전이지만 그땐 그랬다.
그래서 뭔가 모를 해방감, 가슴에 잔잔히 피어나는 룰루랄라 가 분명 있었는데..
아무리 압박감에 시달렸다 해도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이 너무 했는지 남편의 부재가 엄청나게 다가온 일이 생겼다.
학회를 가고 다음 날은 아이들과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잠자리를 들어갔는데 느닷없이 안내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급한 목소리로 토네이도가 캠퍼스 쪽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어서 안전장소로 대피하라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토네이도가 올 때는 기후가 상당히 급하게 변한다.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지고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지므로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난다. 그러니 저녁 먹는 내내 어떤 느낌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싸이렌을 듣고서야 창밖을 보니 심하게 비바람이 불고 있고 나무가 휘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첫째는 아직 자고 있지 않아서 얼른 중요한 것들을 챙겨서 들게 하고 이미 자고 있는 둘째를 담요에 싸안고 계단 밑으로 피신하기 위해 내려갔다.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둘째와는 달리 첫째와 나는 계단 밑에서 오돌오돌 떨며 강한 공포에 휩싸여있었다. 그래도 엄마니까..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 했지만 아주 숨길 수는 없었다.
하필이면 이때 남편이 없다니.. 정말 그의 부재가 그렇게 크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계속해서 울려대는 싸이렌 소리에 귀가 멍해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주변이 아무런 인기척도 없다는 것이었다. 기숙사 한 동에 8 가구가 사는데 아무도 우리처럼 대피한 집이 없었다. 다들 다른 데로 갔나.. 생각하니 더 끔찍하게 무서운 상황이다. 우리만 외딴 섬에 홀로 남겨진듯한. 5학년 아들과 세상모르게 잠에 빠진 5살 아들을 데리고 공포와 두려움에 이미 반은 넋이 나간 듯한 모습의 가녀린 한 여인..
영화 트위스터 보다 더 무서운 상황이다. 어떤 위험한 일이 벌어지기 직전의 긴장감 넘치는 때가 더 소름 돋게 싫은 걸 경험했다.
학교에서 이미 토네이도에 대해 배운 첫째가 물었다. "엄마, 우리 이제 죽는 거야?" "아니야.. 괜찮아. 우리 기도하자." 첫째와 손을 꼭 잡고 하나님 우리 가족을 토네이도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세요.. 하고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기숙가 입구 문이 쾅하고 열리면서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아.. 이제 정말 죽는구나.. 첫째를 꽈악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고 눈을 떠 보니 비에 쫄딱 젖은 덩치 큰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바람에 문이 확 젖혀지면서 그렇게 큰 굉음을 낸듯하다.
아.. 살았다. 첫째와 나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 그 흑인 남자에게 물었다.
"바깥은 어때요?"
"금방 토네이도가 옆동네에 터치 다운( touch down) 하고 사라졌어요. 집에 가셔도 됩니다."
그렁거리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전히 쌕쌕 거리며 잘 자고 있는 둘째를 끌어안고 집으로 올라갔다.
이게 뭐야.. 안도의 한숨을 쉬고 난 후.. 드는 감정은 기쁨인 듯도 했지만 뭔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마중 나와 겪은듯한 억울함, 쪼그라들었던 심장이 온전히 제 모양으로 돌아오지 못한 듯 답답한 가슴, 등 뭐라 형언하지 못할 어떤 이상한 상태였다. 한동안 큰 교통사고나 사건 후 갖게 된다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랑 비슷한 증세가 나타났었다.
유학을, 이민을 계획할 땐 조금 두려움도 있지만 이국에 대한 설렘,기대도 생겼지만
낯설고 물설은 이방에서의 나날들은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가에서 유유히 누리는 낭만이 아닌 급한 물살로 주변의 사물들을 몽땅 쓸어가 버릴듯한 격랑에 맞서며 전투적인 자세로 살아내야 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