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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열 Oct 16. 2023

까는 남자

 아내가 홈쇼핑 채널을 보고 있다. 불안하다. 전복을 살 것 같다. 저게 배송되어 오면 까야 하는데… 불안함은 항상 현실이 된다. 며칠 후, 전복이 도착한다. 

 전복은 심하게 싱싱하다. 우선 솔로 표면을 씻는다. 그런 다음 껍질과 분리한다. 숟가락이 껍질의 둥근 모양과 비슷하여 사용하기 편하다. 내장을 떼어내어 따로 보관한다. 저건 아마 내일 아침이면 전복죽이 되어 식탁에 오를 것이다. 

 손질한 전복을 적당한 크기로 썰기만 하면 회가 된다. 한 점을 기름장에 찍어 먹는다. 꼬들꼬들한 식감과 바다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회를 즐기는 사이 몇 마리는 껍질째 찐다. 찐 전복은 부드럽고 탄력이 넘친다. 회와는 또 다른 맛이다.

 전복은 뭘 해도 맛있다. 탕국이나 황탯국에 넣어도 좋고, 버터를 녹여 마늘과 함께 구워도 맛있다. 그래서인가? 별명도 바다의 산삼이다. 다만 한 가지 불편한 건 까야 한다는 거.     


 김치를 담가야 한단다. 그래서 마늘을 준비해야 한단다. 까라는 얘기다. 마늘을 물에 담근다. 먼지 나는 걸 방지할 수도 있고, 까기도 편해서이다. 한 알, 한 알, 껍질을 벗겨낸다. 이걸 언제 다 하나 싶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과장된 속담이 있다. 그리고 속담은 대부분 맞다. 그렇게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면 어느샌가 수북이 쌓인 마늘 태산이 된다.

 마늘만큼 많이 쓰이는 음식 재료도 없을 듯하다. 생으로도 먹고, 고기를 구울 때 같이 굽기도 하고, 국이나 찌개, 조림 등 끓이는 음식에도 빠짐없이 들어가며, 심지어 발효시켜 먹기도 한다. 흑마늘처럼 말이다. 

 씻어놓은 마늘은 순백색의 깨끗함을 가지고 있다. 저 깨끗함은 곧 갈리고, 찧어서 빨간 김치 양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알싸한 맛을 주는 고마운 존재가 되겠지. 그러고 보니 내일쯤이면 생강도 까야 할 것 같다. 김치에 얘도 들어가니.     


 주말에 아들이 온단다. 뭘 해서 먹일까? 고민하더니 전에 왔을 때 더덕구이를 잘 먹더란다. 그렇다면 더덕을 까야 한다는 얘기다.

 마치 수술하는 의사처럼 라텍스 장갑을 착용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덕의 하얗고 끈적한 진액이 한동안 손의 사용을 괴롭힌다. 윗부분을 잘라내고 한 방향으로 돌리면서 더덕의 껍질을 벗겨낸다. 풍겨 나오는 더덕의 향이 정말 좋다. 어느새 생각은 향기를 따라 과거로 돌아간다. 

 더덕을 처음 본 건 군대에 있을 때였다. 무슨 작업을 하러 산속으로 들어갔는데 강원도 출신이었나? 누군가 더덕을 캐어 왔다. 그때의 진한 더덕향은 더덕의 맛보다 더 강렬해서 잊히지 않는 향이 되었다. 지금의 더덕향이 그때만큼 진하지 않게 느껴지는 건 생각이 그런 걸까? 아니면 실제로 그런 걸까? 

 더덕의 연한 속살이 부서지지 않으면서 양념이 잘 스며들게 적당한 힘으로 찧는다. 맛있는 빨간색 양념을 바르고 은은한 불에 구워내면 향기로운 더덕구이가 된다. 건강한 음식이다. 그래서 좋은 음식이고. 뭐, 까야 하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이번엔 호박이다. 텃밭을 하는 지인이 고맙게도 매년 누렇게 익은 호박을 주신다. 그걸로 항상 호박죽을 해 먹는데 그러려면…

 까야 한다. 둥근 호박을 반으로 쪼개고, 그 반을 또 반으로 쪼개고, 그 반을 또 쪼개면 통제가 가능한 크기가 된다. 속의 씨앗을 파내고, 식칼로 딱딱한 껍질을 벗겨내어 조리가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놓고, 외출한다. 돌아오면 자극적이지 않은 은근한 맛있음을 장착한 호박죽이 되어 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 혹은 젊었을 때는 먹지 않았던 음식이 호박죽과 김치 국밥이었다. 호박죽은 밋밋한 맛이 싫었고, 김치 국밥은 가난의 기억이 싫어서였을 것이다. 세월이 약이라는 건 사랑의 상처에만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었다, 시간의 더께가 쌓이니 가난한 기억의 상처는 잊히고, 밋밋함에 숨겨져 있는 은근한 맛을 찾아내게 되니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까는 남자가 되어 있다. 합리적으로 얘기하자면 손목 힘이 좋은 남자가 호박이니, 박이니 하는 딱딱한 음식 재료를 손질하는 게 맞아 보이긴 하지만…

 깐다는 건, 껍질을 벗긴다는 건 귀찮은 일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뭔가를 하지 않으면 맛있는 뭔가는 없을 테고, 또 평화는 공평한 분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뭉크-비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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