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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열 Jan 19. 2024

육 인용 식탁

 육 인용 식탁을 사잔다. 왜? 딸랑 두 명이 살고 있는데, 도대체 왜?

 쓰고 있는 식탁이 오래되기도 되었지만, 아들, 딸이 모두 결혼해서 며느리, 사위까지 집에 오면 한 식탁에 앉을 수 없단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런 일이 생기는 경우가 일 년에 몇 번이나 되려나? 나머지 날들은 덩그러니 비어있는 상태일 테고, 또 아이들이 오더라도 외식하는 경우가 더 많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지만, 어쩌겠는가? 그렇다니 그렇게 할 수밖에. 그런데, 가만, 놓을 자리가 있긴 있는가?     

 

 부엌을 둘러본다. 더 큰 식탁이 놓일 자리는 없어 보인다. 지금도 비좁아 보이니… 부엌에 자리하고 있는 김치냉장고를 베란다로 옮기면 된단다. 베란다를 살펴본다. 당연히 김치냉장고를 놓을 자리는 없다. 지저분해 보이는 선반과 이것저것이 들어있는 수납장을 치우면 될 것 같긴 하다. 지저분한 녀석은 버리면 될 테지만 수납장은 또 어디로? 다른 쪽 베란다의 수납장과 나란히 두자고 합의한다. 그리곤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는데 이게 쉽지 않다. 비어있는 공간에 들여놓는 게 아니라 비워가면서 들여놓는 일이니, 말이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육 인용 식탁이 부엌에 자리를 잡았다. 가구 하나 자리 잡는 게 이렇게 어렵나 싶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사람이 자리 잡는 것도 마찬가지 아니려나,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업종에 새로이 뛰어드는 일, 어떤 조직이나 어떤 공간에 새로이 비집고 들어가는,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는 물리적인 공간이나 영역을 비집고 들어가는 일 말이다. 취직이나 창업 또는 개업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하지만     


 때로는 매우 불공정한 예도 있다. 다른 가구들을 이리저리 치우고 제 자리를 비워놓아 세상 편하게 자리 잡은 이 육 인용 식탁처럼, 세상 편하게 자리를 차지하는 편한 인생들이 있더라는 것이다. 하긴 산다는 것이 불공정함의 연속일 테니 어쩌겠는가? 그 불공정이 조금씩은 줄어들고 있다고 굳세게 믿으며 사는 수밖에.     


 아내와 새 식탁에 마주 앉아 식사한다. 널찍하니 좋다. 좋은데, 채워진 두 개의 의자보다 비어있는 네 개의 의자에 눈길이 간다.

 꼬물꼬물 함께하던 아이들이 슬금슬금 자라더니, 어느덧 어른이 되더니, 식탁을 슬금슬금 비우더니, 이제는 제 가정의 식탁에서 자리를 잡고 우리 집 식탁을 떠났다. 아쉬움이랄까? 대견함이랄까? 뭐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감정이다. 그 옛날 둥근 밥상에 옹기종기 앉았던 우리가 한 명 한 명 떠나갈 때의 부모님들도 그런 마음이었으려나?     


 저 빈자리는 비어있지만, 꼭 비어있는 것만은 아닐 게다. 언제든 아이들이 오면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낼 자리로 맡아두는 것 일 게다. 함께 할 빈자리를 맡아두는 것, 내 부모님의 부모님이 그러했을 것이고, 내 부모님이 그러했고, 지금 내가 그러하듯이 내 자식들도 자기 자식의 자리를 맡아두는 부모가 될 테지. 그렇게 대물림하는 것, 그게 살아가는 것이니.


조르조 모란디 -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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