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훼가 아브라함한테 뜬금없이 말했다. “너, 네 외아들 이삭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말하는 산에서 그 애를 제물로 바쳐라.”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겠지만, 아브라함은 말 없이 이삭을 데리고 출발했다. 3일째 되는 날, 이삭이 묻는다. “아버지, 불도 있고 나무도 있는데, 제물로 바칠 어린양은 어디 있나요?” 아브라함이 대답한다. “얘야, 야훼가 알아서 준비할 거야.”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아브라함은 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놓은 다음, 이삭을 묶어서 나무 위에 얹더니 칼을 잡고 이삭을 치려고 했다. 그때 하늘에서 천사가 나타나서 급히 말렸다. “그 아이한테 손대지 마라! 네가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은 걸 보니, 네가 정말 야훼를 두려워하는구나. 이제야 알았다.”
아브라함이 주위를 둘러보니, 숫양 한 마리가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그래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대신 제물로 바쳤다. 그리고 그 장소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불렀단다. '하느님의 산에서 준비된다'라는 뜻이다.
하! 야훼와 동행하는 삶이란 이런 거다. 만약 야훼가 순간 딴 데 보고 있거나 깜빡 졸았으면, 이삭은 고기 덩어리로 제단에 올려졌을 거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살에 본처 사라에게서 얻은 아들이었다. 사라는 나이 많아서 애 못 낳는다고 했는데, 야훼가 출산 능력을 ‘야, 다시 켜!’ 하고 회복시켜줘서 겨우 낳은 아들이란 말이다. 그런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니…
이건 거의 범죄 교사 수준이지 않나? 창조주인 야훼니까 자기가 만든 사람 목숨은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건가? 야훼가 사람 목숨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는 <욥기>를 봐도 알 수 있다.
이제 욥 얘기를 해 보자. 우스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진실하고 정직하며 악을 멀리하는 진국이었다. 일곱 아들과 세 딸을 낳고, 양 7,000마리, 낙타 3,000마리, 소 1,000마리, 암나귀 500마리, 종들도 수두룩했고, 동방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
어느 날, 천사들이 야훼 앞에 모였는데, 사탄도 같이 껴 있었다. 야훼가 사탄에게 묻는다. “어디 갔다 왔냐, 사탄?” 사탄이 대답한다. “땅을 두루 돌아다니다 왔습니다.” 야훼가 자랑스럽게 다시 묻는다. “내 종 욥 봤냐? 그처럼 진실하고 나를 잘 섬기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없다.” 사탄이 빈정거리며 대답한다. “당연하죠. 주님이 그 사람 가정이랑 재산을 죄다 보호해주시고, 하는 일마다 축복해주니 부자가 됐죠. 근데 그가 가진 것들 다 빼앗아 보세요. 당장 주님을 저주할걸요?”
야훼가 선언한다. “좋다. 네 맘대로 욥의 재산을 가져가라. 하지만 욥의 몸에는 손대지 마라.”
결과는? 스바 사람들이 욥의 농장을 쳐들어와서 소랑 나귀를 싹 다 빼앗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양떼를 다 태워 죽이고, 갈대아 사람들이 낙타까지 싹 끌고 가버렸다. 종들은 전령 하나 남고 전부 죽었다. 그리고 그것도 끝이 아니었다.
어떤 종이 욥에게 와서 말한다. “주인의 자녀들이 맏아들 집에서 식사하다가 갑자기 태풍이 불어와서 집이 무너져 다 죽었습니다. 저만 살아남았어요.”
욥은 땅에 엎드려 경배하면서 이렇게 말했단다. “내가 태어날 때 아무것도 없었으니, 죽을 때도 아무것도 못 가져가리라. 주신 자도 야훼요, 가져가신 자도 야훼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야훼는 사탄과 내기하느라 욥의 자녀들 10명을 죽게 했다. 가축 11,500마리쯤이야 내기에 걸 수도 있다. 근데 사람 10명을 내기에 걸다니! 다 죽어버릴 것을 알고도 말이다.
사탄과의 내기에서 이기자, 야훼는 욥을 갑절로 부자로 만들어 줬단다. 그러니까 가축은 23,000마리가 된 거다. 근데 자녀는 똑같이 7남 3녀를 다시 낳게 했다. 그러나 내기 때문에 죽은 10명은 뭐, 동정 한 마디 없이 그냥 묻힌 거다. 그들은 이름도 없다.
이제 상상해 보자. 내 자녀 10명이 재앙으로 다 죽었는데, 나는 “주신 자도 야훼요, 가져가신 자도 야훼니 찬양합니다!” 한다? 요즘 시대였다면 욥은 바로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거다.
야훼의 천사가 다시 나타나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너, 네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내가 너한테 복을 줘서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네 후손들이 원수들을 정복하고, 세상의 모든 민족이 네 후손을 통해 복을 받을 거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2,000년 동안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를 설교 소재로 써먹었고, 신자들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떠받들었다. 아들을 죽이려고 한 자가 믿음의 조상이라니! 요즘이었다면 아브라함도 욥처럼 정신 치료를 받았어야 할 거다.
신약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가 더 빵빵 터져. 하느님이 인류의 죄를 용서하려고 자기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저 이삭을 죽이는 척만 했는데, 하느님은 진짜로 예수를 죽였다는 거다. 만약 진짜 그렇다면, 하느님도 정신병원에 입원시켜야 한다.
아버지가 아들의 동의 없이 아들을 죽여 제물로 바칠 수 있다고? 그게 기독교의 신조라니… 여기서 우리는 가부장제 피해자가 여자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어린아이의 권리가 보호받고 보장된 건 최근 일이다. 100년 전만 해도 아이들은 그저 부모 뜻대로 굴려졌다. 지금도 많은 아이들이 버려지고 학대받고, 심지어 잘사는 집 아이들도 부모가 하라는 대로 끌려가는 경우 많다. 아이가 가수나 배우 되고 싶은데 부모가 "너는 의사 돼야 해!" 하고 억지로 공부시키는 거다. "내 자식이니까 내 마음대로 한다!"라는 사고방식,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것과 아주 비슷하다. 이젠 물어보자. "너 의사 할래, 아니면 다른 거 하고 싶니?"
아브라함도 이삭한테 물어봤어야 한다. "야훼가 너 죽여서 바치라고 했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진짜 죽여도 되니? 만약 죽기 싫으면 도망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