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됐어요. 22일까지입니다.
책을 대출해 드리며 반복하는 말이다. 어쩌면 '사서'는 오늘과 내일, 내일모레와 일주일 뒤가 며칠인지 끊임없이 상기하는 직업일 것이다. 대출과 반납이란 시작과 끝이 명확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 책을 빌리러 오신 분들은 (연장하지 않는 한) 22일까지 반납하셔야 한다. 12월 22일.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깊은 동짓날이며, 나의 생일날이다. 길고 깊은 어둠을 헤매며 태어났다. 엄마에게도 무척이나 길고 깊은 밤이었을 것이다. 그날로부터 시작된 길고 깊은 사랑을 받으며 스물네 번째의 동지를 기다리는 겨울이다.
도서관에서 일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사실 도서관은 조용하지 않다. 웅성거림이 가득하다. 당신이 부지런히 읽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책을 배가하다가 스무 살 즈음 엄마가 권해줬던, 그러나 아직까지 읽지 못한 책을 마주친다. 스물다섯에는 꼭 읽어볼게 엄마. 하며 책을 꽂는다. 다음 책을 집으니,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당신은 이 책을 읽고 작가의 고향인 체코로 떠났다. 한 인생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이게 했다. 다만, 나에게는 어려웠고, 우리 집 강아지 모찌가 귀퉁이를 문 자국이 있는 책. 그 정도뿐이다. 한 책에 대한 감상의 차이를 떠올리며 책을 꽂는다. 이런 식이다. 책 한 권 한 권이 말을 건다. 혹은 내가 말을 건다. 작가와 문장과 장면과 기억이 마구 엉킨다. 결국 손은 책을 배가하고 눈은 청구기호를 따라 움직이만, 머릿속은 아주 많은 이야기가 가득한 상태가 된다.
요즘은 여행 도서 대출률이 높다. 주로 오사카나 다낭에 관련한 책이다. 추운 겨울을 잠시 떠나 따뜻한 곳에 가려나 보다. 나도. 가고 싶다. 따뜻한 곳. 아니어도 좋으니, 어디든. 여행의 유희를 원하는 것인지, 그저 도망치고픈 건지 헷갈리지만- 어디로든 떠나고 싶다. 익숙한 곳, 편안한 곳,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귀소 본능으로 살아온 나에게 새롭게 떠오른 마음이다. 얼마 전 도망치듯 여행을 떠난 이의 글을 봤다. 이런 말이 있었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 대기석에 앉아 비행기 탑승 알림을 기다리던 지은은 어디선가 읽었던 문구를 떠올렸다. 아니, 그건 완벽하게 틀린 말이다. 어딘가로부터 도망친 사람이라면, 당도할 곳이 낙원이길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지옥에서 조금만이라도 멀어지길 바랄 뿐. 그거면 충분하다. (친절한 사람들, 보래)
지은이 어떤 마음으로 여행을 떠났는지 고스란히 전해진다. 나도 얼마 전 도망쳐온 곳이 있다. 이름하여 '스터디 카페' 다. 도망친 대상은 침대다. 며칠 전부터 침대에게 잠식당했다. 단순히 침대에 눕고픈 마음, 오래 누워서 허비되는 시간 정도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눕기만 하면 몸과 마음과 영혼과 시간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사실 침대 모양을 한 깊은 우물일지도 모른다. 베이지색 침대 커버 정중앙에 블랙홀의 소용돌이를 떠올려보라. 도저히 그런 상황을 내버려 둘 수 없어서 피신했다. 당도할 곳이 낙원이길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침대에서 멀어지길 바랄 뿐. 그거면 충분하다. 했는데, 아니 이곳은 낙원이다. (그런데 값이 조금 센) 다양한 비품 대여와 간식 제공과 쾌적한 시설과 스물네 시간 개방이라니.
낙원에 너무 오래 머무르면 침대 모양을 한 우물 (혹은 블랙홀)이 질투한다. 오늘은 다시 잠식당할 뻔했지만, 출근이 살려주었다. 살려주었다는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빽빽한 지하철을 탄다.
퇴사 이유, 엄마 얼굴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서,라는 사직서를 받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이거 이거 이거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구만, 아직 배가 덜 고팠구만, 이런 말 을 적어도 나는 할 수가 없다. 내 첫 직장의 퇴사이유가 '지하철을 타기 싫어서' 였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광고대행사에 취직을 했다. 1990년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광고대행사들이 충무로에 있었다. 수유리에 있는 집에서 충무로까지는 4호선을 타면 20분이면 충분히 닿는 거리였지만 당시 지하철은 말 그대로 '지옥철'이었다. 지옥의 풍경이 있다면 이러리라고 아침마다 생각했다. 상계 노원 쌍문을 지나며 사람들을 태운 지하철은 내가 탈 즈음에는 이미 발 디딜 틈이라곤 없었다. 푸쉬맨들이 손바닥을 팡팡두드리며 준 비를 하고 있다가 사람들을 안으로 밀어넣었다. 비명이 나왔지만 밀려들어가서는 사방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납작콩이 되었다가 다시 다음 정거장이 될라치면 내리는 사람들에 의해 떠밀려 밖으로 튕겨나왔다. 특히 동대문이나 동대문운동장이 되면 거대한 사람파도가 나를 떠밀기 때문에 발이 공중에 뜬 상태로 쓸려나왔다. 사람쓰나미에 휩쓸려 밖으로 나오면 숨이 쉬어지지않아 몇 초 동안 바닥에 앉아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렇게 한달 두달 세달, 어느날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실갱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 만지느냐, 내가 널 언제 만졌다고 그러냐, 지금 만지지 않았느냐, 이년이 생사람 잡네, 그 와중에 한 가지 생각이 빛처럼 선명하고 오롯하게 떠올랐다. 내가 이러려고 태어난 거 같지는 않아. 다음날 사표를 냈다. 물론 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지하철이었다.
충무로에서 양재로 가는 지하철에서, 수유리에서 충무로로 오던 어딘의 글을 떠올리며 창을 바라본다. 지하도는 어두워서 차창에 얼굴이 선명히 비친다. 얼굴을 본다. 표정을 본다.
원치 않는 표정으로 살게 될지도 몰라.
원치 않는 표정으로 살게 될지도 몰라.
원치 않는 표정으로 살게 될지도 몰라.
침대의 블랙홀 속에서 일까. 책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일까. 혹은 당도한 낙원으로부터 일까. 이런 문장이 어딘가로부터 떠올랐다. 너무 가벼운 물체를 물속 깊이 넣으려고 해도 저항 없이 수면 위로 올라와버리는 것처럼. 올라와버린 문장이었다. 가끔씩만 서울에 와서 가끔씩만 지하철을 탈 때, 모든 사람들이 짓고 있던 표정이 있다. 표정이 없는 표정. 표정이라 말하기 뭐 한 모양새들이었다. 승강장에서의 걸음은 늘 분주했고 오로지 앞만 봤다. 기이한 모습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기이하지 않다. 그보다 더 기이한 표정을 하는 내가 있다. 창에서 시선을 거둔다.
지나간 11월을 곱씹으며 '그래도 꾸역꾸역 힘겹게 일어나 도착한 곳이. 그래도 도서관이라 다행이다'라고 했다. 불과 며칠도 안된 그 마음에 옅은 의심을 품으면서 책을 꽂았다. 쉬는 시간에는 이슬아 작가의 [날씨와 얼굴]을 읽었다. 역시나 두 눈이 바깥을 향한, 결코 자신만 바라보지 않는 글이었다. 우리와 연결된 다양한 얼굴을 떠올리며, 육류 소비를 줄이리라 다짐한다. 이런 다짐은 [아무튼 비건]을 읽은 이후 두 번째다. 책을 읽다가 꽂다가- 하더니 퇴근 시간이 왔다. 아침에 탔던 지하철을 다시 탄다. 아침에 보았던 창을 다시 보진 않는다. 대신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린다. 지하철에서는 시공간과 어깨결림이나 다리 저림 등을 잠시 깜빡 잊게 해 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어제는 김사월과 정우의 라이브 영상이었다. 오늘은 알맞은 걸 찾지 못해 많은 감각들을 깜빡 잊지 못한 채 고스란히 느끼며 도착했다.
허하다. 분식점에 들어가 치즈불닭쫄면을 시킨다. 육류 소비를 줄이겠다던 한 시간 전 다짐이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싶어 진다. 나에게는 순식간에 맛난 채식 요리를 차려주시는 복희 님이 안 계시고, 더군다나 개인 부엌도 없다. 어쩔 수 없다. 쫄면이 나왔다. 군데군데 닭이 보인다. 생각은 그만하기로 한다. 핸드폰에 틀어둔 홍상수 영화로 시선을 돌린다. 혼밥 할 때마다 조금씩 봤더니, 오늘 저녁 혼밥 시간에 드디어 영화를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영화가 끝났고 식사도 끝났다. 평점을 찾아본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잠이 들었다. 당신을 체코로 가게 만들었고 나에게는 어려웠던 그 책을 떠올린다. 우리에겐 간극이 있다.
글쓰기는 종종 이 간극을 메운다. [날씨와 얼굴]에서 글쓰기는 디스토피아를 극복할 수단 중 하나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작가는 물론이다.라고 답한다. 물론이다. 물론이다. 이 대답은 언제나 물론일 것이다. 유약하고 무른 것을 내보이겠다던 마음과 물론의 마음을 떠올리며 오늘도 처량해진다. 원치 않는 표정으로 살게 되면 원치 않는 말을 하고 원치 않는 걸음을 걷게 될까 봐.
-새벽 다섯 시 반, 도망쳐 온 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