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이 없다고 글을 쓸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정말 자신이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인지 잘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작가는 오로지 쓰는 것으로 증명되기 때문에요. 누군가가 꼰대에 옛날 사람이라고 말해도, 저는 읽지 않는 사람이 좋은 글을 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또한 오로지 머리 빠지게 쓰는 행위를 하는 동안만 그는 작가라고 믿습니다. 사람은 호칭이 아닌 행위로 증명되므로 바람과 행위를 일치시키는 하루, 그런 시간을 허락받는 하루를 보내시기를.
김겨울 작가님이 인스타그램 공지 채널로 보내주셨던 문장이다.
마감 없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여기에도 있다. 열음과 말초. 그들은 마감 없는 세계에 스스로 마감을 만들어 자발적으로 똥줄을 탄다. 서로의 글을 읽고 나면 “꺼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한다. 열음이 제안한 인사말이다. 열음은 함께 앉아 동시에 글을 쓰는 마음이, 마치 상대가 맛있게 먹어주길 바라며 요리하는 마음 같았다고 한다. 그녀가 요리한 글은 짜갑다가도 달고, 또 담백하다. 아는 맛과 새로운 맛이 뒤섞인 마음을 친절히 꺼내준다.
우리의 첫 글모 후 열음이 쓴 글에는 ‘서로의 글이 좋을 것을 예상했기에’라는 문장이 있었다. 나는 나의 글이 좋으리라 짐작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누군가 예상해 주니 그냥 그 예상을 믿어버리기로 한다. 그럴 때면 신나서 손이 맘을 앞선 글을 써 내려간다.
열음의 생각은 부지런하고 손은 단련되어 있다. 누군가 이슬아 작가님께 어느새 너는 숙련된 세탁소 사장님처럼 글을 쓴다고 말했다. 점심시간 붐비는 김밥 집에서 일하는 사장님을 보며 생각한다. 지금의 나라면 이렇게 말했을 거야. 김밥 집 사장님이 김밥을 훌훌 말아버리듯 글을 쓰네. 내 앞에 앉아 별다른 표정과 자세의 변화 없이 타자를 두드리는 열음이 꼭 그렇다. 열음이 훌훌 말아준 김밥을 먹는다.
당신은 당신을 발견하기 위해. 다른 이의 언어로 설명받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렇게 나 아닌 사람이 쓴 나에 대한 분명한 언어를 읽으며 깊이 빠져든다.(우정 도둑, 유지혜)
무심코 스친 감정을 열음의 언어로 설명받는다. 그러고 보니 열음의 언어를 설명하기 위해 유지혜 작가님의 언어를 또 빌려왔다. 배움은 훔쳐 먹는 것이라던 어느 배우의 수상소감처럼, 부지런하고도 아름다운 글을 잘 훔쳐먹고 있다.
열음은 정말 용감무쌍한 사람이다. 우선 ‘해 말아에서 해를 맡고 있는 인간입니다’ 하고 자기소개를 적어두는 것부터가 그렇다. 열음이 공연장에서 듣고픈 앵콜곡을 크게 외칠 수 있는 반면, 나는 그런 부분에서 아주 소심하다. 그런 내게 “말초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용감해요”라고 말하는 열음이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향해 무턱대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마음. 글쓰기 모임을 하자고 제안하는 마음 같은 것. 대부분의 날에 용감한 열음과 결정적인 순간에 용감한 말초. 우리가 써 내려갈 이야기는 또 어떤 모양으로 용감할까.
서로의 용감함을 자꾸 발견하는 동시에 서로의 탁월함에 놀란다. 열음은 나의 아이디어에, 나는 그 아이디어를 순식간에 실재로 만들어버리는 그의 ‘해’력力 (‘해’ ‘말아’의 ‘해’)에 놀란다. 그녀가 실재로 만든 아이디어가 시작을 앞두고 있다. 2023의 마지막 걸음이 오래 이어질 이야기의 첫걸음이 되길 바란다.
아직 두 번의 글모가 전부인데, 마치 스무 번은 넘은 듯 서로를 적는다. 아낌없이 맘을 꺼내버리는 우리가 함께여서 좋다. 팟캐스트도 하고 글만 디립따 적어버리는 여행도 가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서로의 폴과 소피칼이 되어볼 앞으로를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