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지지 않는 마음. 세 번째 글모 주제다. 이 문장을 가지고 세 번째 재주넘기를 해야 한다. 재주넘기를 해본 적이 있다. 넘기 전에는 조금 떨리지만, 넘고 나면 또 넘고 싶어진다. 오른쪽으로 하면 왼쪽으로도 해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익숙한 방향으로 돌게 된다. 열음과 나는 각자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글을 쓴다. 쓰기 전에는 무엇이 될지 모르지만, 서로가 서로를 읽고 나면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다. 짜릿하기도, 아프기도 하고 훌훌 가볍다가도 바닥에 무겁게 쿵! 찧는다. 재주넘기와 글쓰기가 그렇다.
열음과 나의 글에는 약속한 듯이 '촛불'이 등장했다. 나는 '나'라는 촛불이 꺼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불을 붙여주는 '너'를 떠올리며 썼다. 열음의 글을 읽고 나니 열음은 '너'같은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촛불이 꺼지지 않길, 꺼지지 않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바닥까지 차오르는 사랑과 꺼지지 않는 기도가 있었다. 기도...는 참으로 떠들썩하지 않은 사랑이다. 아무도 몰라주어도 잠들기 전에 되뇌는 사랑. 나만큼. 나보다 행복하길 바라며 잠에 드는 사랑.
열음은 편지 형식인 나의 글을 읽고 수신인이 분명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수신인 아주 많은 편지를 썼다. 아주 많은 사람이 불을 밝혀줬기 때문이다. 조용히 날 위하여. 그들의 사랑은 어느 한구석도 떠들썩하지 않았다. 조용한 사랑은 티 없이 맑은 눈 같아서. 아무도 밟지 않은 눈 같아서. 뽀드득거린다.
열음이 나의 글에 관해 이야기하는 동안 화면 너머의 말과 표정을 유심히 받으며 생각했다. 소중한 시간이라고.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단어를 이미 살고 있다. '반추'라는 단어를 몰라도 이미 반추하는 삶을 살고 있던 것처럼. 우리는 또 어떤 모르는 단어를 살고 있을까. 어떤 모르는 문장을 살아내고 있을까. 아주 생경한 문장이 이토록 가슴 깊이 들어오는 순간은, 알지 못했지만 이미 살고 있던 단어와 마주치는 순간이 아닐까. 최근에 장그르니에의 [섬]을 읽으며 그런 순간을 많이 만났다. 죄다 낯선 표현과 감상들인데. 몇 번이고 살아낸듯했다. 이런 순간이 좋아 책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귀를 간지르는' 매운 라면을 먹었다. 정확한 표현을 적어두신 덕에 알맞은 맵기를 고를 수 있었다. (초보 맛이나 착한 맛이 아닌, '귀를 간지르는 매콤함'이라고 적혀있었다) 삶에서 겪게 되는 맵고 쓰라린 정도도 선택이 된다면 좋을 텐데. 그럼 시가 되고 노래가 될 만큼만 처량해질 수 있을 텐데. 귀가 간지러운 만큼 아린 사람은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지만, 그 이상으로 아릴 때는 말할 수 없는 탄식이 나온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6)
조용한 사랑은 말할 수 없는 탄식이다. 누군가를 위해 탄식하게 될 때, 오롯이 내 귀에만 들리는 큰 한숨에는 가장 조용한 사랑이 담겨있다. 뽀드득거리는 마음과 꺼지지 않는 기도를 지나, 결국 바라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탄식이다. 귀를 간지르는 노래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탄식을 가지고 싶다. 탄식을 품고 품다가.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조용히 사랑하다 보면 꼭 그때가 온다. 떠들썩해야 할 때. 이제는 노래를 불러야 할 때. 시를 써야 할 때가 온다. 그때를 알아차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하고 싶다. 결실을 결실로 알아차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하고 싶다. 동터 오르는 시기를 무참히 지나쳐 버리지 않기 위해 기도하고 싶다.
조용히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자주 흥얼거리던 복음성가의 가사가 떠오른다. 왜 조용히 널 위해야만 했는지 알 것 같다. 글을 쓰려고 만난 열음은, 기도하게 만든다. 기도하는 사람은 살피는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앞으로 우리가 살필 세상과 삶과 단어를 헤아려 본다.